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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우리의 빚을 탕감하소서주님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6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해 언급하고, 그 다음에 ‘전례용 주님의 기도’에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빚진 이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예수시대에 ‘빚’ ‘부채’ 문제는 수많은 이들이 겪은 고통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 채무자들은 터무니 없는 이자에도 불구하고 빚을 져야 할 만큼 사실상 ‘상환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땅은 물론이고 가축과 가족, 자기 자신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빈발했다. 즉, 빚 때문에 종이 된 자도 많았다.

이 혹독한 현실에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자가 타인의 빚에 대한 탕감을 전제로 자신의 죄를 사면해 달라고 청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 동등한 처지에서 돈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가 행하는 것이다.

이 요청은 단순히 타인의 잘잘못을 따지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가난한 자, 자신보다 더욱 배제된 자, 자신보다 훨씬 무력한 자를 받아들이라는 신앙적 요청이다. 기도의 앞 대목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면, 이 대목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가 무력한 자를 돌보라는 요청이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주님의 기도에서 양식을 구하는 것이 적극적인 요청이라면, 빚 탕감은 소극적인 요청이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물, 예컨대 가족의 농지를 잃게 되거나, 가족 가운데 몇 사람 혹은 모두가 종이 된다. 먼저 토라는 이웃들의 끼니에 대한 도움과 생계를 위해 돈을 빌려주는 것에는 이자를 금지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적 대부에는 이자를 금지하지 않는다. 과도한 이자와 저당은 부채를 갚지 못한 이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며, 토라는 이 노예조차 안식년에는 해방시키라고 규정한다.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그를 거들어 주어야 한다. 그도 이방인이나 거류민처럼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에게서 이자나 이익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 형제가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자를 받으려고 그에게 돈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되고,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양식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된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5,35-38)

“너희는 이웃에게 무엇이든지 꾸어 줄 경우, 담보물을 잡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밖에 서 있고, 너희가 꾸어 줄 사람이 밖으로 담보물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그 사람이 가난하면, 너희는 그의 담보물을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 그가 자기 겉옷을 덮고 잘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너희를 축복할 것이며,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다.”(신명 24,10-13)

“너희 동족인 히브리 남자나 여자가 너희에게 팔려 와서, 여섯 해 동안 너희의 종으로 일할 경우, 일곱째 해에는 그를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한다. 너희가 그를 자유로이 놓아줄 때, 그를 빈손으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에게 너희의 양 떼와 타작마당과 술틀에서 넉넉히 내주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것을 그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다는 것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해 내신 것을 기억하여라.”(신명 15,12-15)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했듯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는 은유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다 패망한 사건이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2열왕 25,7) 열왕기에서는 치드키야가 바빌로니아에 패망한 것은 안식년에 부채를 탕감하고 부채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였다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오늘의 풍족한 양식과 더 이상 부채가 없는 내일을 문자적으로 희망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의 오랜 꿈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이길 선호한다. “빚”은 “죄”를 뜻하는 것으로, “저희에게 잘못한/죄지은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빚과 죄가 깊은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베드로가 묻는 장면(마태 18,21-22)에 이어서, 자신은 큰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을 감옥에 넣어버리는 매정한 종의 이야기(18,23-35)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빚”과 “죄” 모두를 읽어내야 한다. 성서전통은 빚이 너무나 큰 불평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죄가 많은 상황이 되어버린다고 가르친다.

또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타인의 빚/죄를 탕감/용서할 때에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탕감/용서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 덧붙여진 말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3-15)

[참고]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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