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오늘' 굶주리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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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오늘' 굶주리지 않게 하소서
  • 한상봉
  • 승인 2018.03.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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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5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주님의 기도’ 전반부의 주제가 ‘하느님’이라면, 후반부 주제는 ‘사람’이다. 이 둘을 통합한 것이 ‘하느님 나라’이다. ‘하늘’이란 ‘지금여기’에서 가난한 이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정확히 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후반부 기도에서는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하느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구체적 일상으로 끌어내려 설명한다. 그 첫 번째 구절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재물’이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이었다. 배고픔은 그 당시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고통이었다.

루카복음서에서는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청하고, 마태오복음과 디다케에서는 ‘오늘’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청한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루카복음 공동체에서는 매일매일 빵을 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서와 디다케의 상황은 ‘지금 당장’ 먹을 양식을 달라고 간청한다. 이를 두고 <예수의 독설>(김진호, 삼인, 2008)에서는 말기 암환자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말기 환자들은 “날마다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당장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내일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디다케의 기도에는 ‘간절한 종말론’이 배어 있다. 그 나라가 하루속히 와서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이다. 실상 마태오복음은 산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루카복음은 모처에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알려주었다. 디다케는 ‘강론 형식’이라서 맥락을 알 수 없다.

마태오 복음에서 등장하는 군중은 마르코복음의 표현대로 한다면 ‘오클로스’이다. 이들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들, 귀속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예수는 처음에 마을 회당에서 설교했으나, 바리사이들과 충돌하고 나서는 거리에서, 바닷가에서, 산등성이에서 설교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군중들도 회당 체제에 쉽게 포섭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지금 당장 밥 한 그릇 먹는다면 죽어도 좋을 절박한 지경에 있던 자들이었다. 다만 루카 공동체는 아마도 함께 굶주리는 이가 아닌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공동체를 위해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초기교회의 부제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예수와 제자들의 상황에서 ‘곡식창고’라는 말 자체는 실존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당시 어부와 농민 등 가난한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1986년 1월 24일 금요일에 키부츠 기노사르에 살던 어부 모세 루판과 루비 형제는 가뭄이 할 때 바닥이 드러난 갈릴래아 호수에서 1세기경에 만들어진 배를 발견했다. 지금은 이갈 알론 센터에 인양 전시된 이 배는 12가지 목재로 기운 낡은 배였다. 이것은 당시 어부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활동한 갈릴래아 지역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왕이 죽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갈릴래아는 서쪽에 있었고, 베레아는 북부 요르단 강 지역에 동편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기원후 20년경 주 차례나 비폭력 저항운동이 발생했다. 30년경에는 세례자 요한이 베레아에서,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대중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예수는 내륙의 나자렛 출신인데 갈릴래아 호숫가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제자들 가운데 유독 호수 북서쪽 어부들이 많았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그리스어 이름은 ‘타리캐아’는 “소금에 절인 생선”이라는 뜻이다. 필립보와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벳사이다 출신의 어부이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역시 어부 출신이다. 그리고 생선이나 고기잡이와 관련된 기적도 많았다. 빵과 물고기에 관한 기적은 마르코 복음에 둘(6,34-44; 8,1-9), 마태오복음에 둘(14,14-21; 15,32-39), 그리고 루카복음(9,12-17)과 요한복음(6,4-13)에 하나씩 나온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은 기적은 루카복음에선 부활 이전에(5,1-9), 요한복음에는 부활 이후에(21,1-14) 나온다.

예수가 “그 여우”(루카 13,32)라고 불렀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43년 동안 통치하면서 헤로데 왕처럼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분봉왕(quarter ruler)이었기 때문이다. 안티파스는 아버지를 모델로 삼았다. 헤로데왕은 지중해변에 카이사리아라는 멋진 항구를 지어 황제에게 바쳤다. 또한 하스몬 왕족 출신인 공주 미리암네와 정략결혼을 해서 민심을 잡으려 했다. 마찬가지로 안티파스는 나바테야 왕국의 공주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미리암네의 손녀 헤로디아를 설득시켜 남편 헤로데(필립)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도록 했다.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의 첫 번째 수도였던 세포리스에서 세원(稅源)을 늘리지 못하게 되자, 갈릴래아 호수 중서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14-37년)를 기리고자 ‘티베리아스’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이유뿐 아니라 갈릴래아 바다를 상업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린 생선, 소금에 절인 생선, 그리고 그리스-로마인들이 즐겨먹던 “가룸”(garum)이라는 생선소스를 수출할 생각이었다. 아울러 안티파스는 배를 소유하고 저인망 그물로 고기 잡는 일, 심지어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데에도 세금을 부과했을 것이다.

안티파스는 티베리아스 앞 바다에서 어획량을 몇 배나 증가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대응하는 사건이 빵과 물고기를 몇 배로 늘려서 사람들을 먹인 예수의 기적이야기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6,32)는 구절로 시작한다.

하루 종일 가르치고 저녁이 오자, 그 많은 군중들의 식사가 문제였다. 제자들은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6,36) 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였다. 제자들의 전략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전은 달랐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음식부터 분배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나중’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 8,6-8)

하느님의 정의로운 손을 거칠 때는 이 땅 위에 이미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한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문제는 생산량이 아니라 분배정의였다. 부활한 예수가 티베리아스 바다 해변에 나타난 이야기에서는, 예수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는 말을 듣고 그물을 던진 제자들이 건져 올린 생선은 “큰 고기만 백쉰세 마리”라고 했다.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티베리아스 바다가 안티파스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의 바다(the sea of Jesus)가 되었다는 뜻이다. 폭력의 바다가 아니라 비폭력의 평화로운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평화로운 아침식사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갈릴래아 바다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운동이다.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바다를 장악하자, 어부들과 어촌은 불경기에 빠지고, 팔 수 있는 생선뿐 아니라 “일용할” 빵도 없게 된 것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적에,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여기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이 소유주이신 이 땅에서 하느님의 양식을 공평하게 분배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만찬에서는 빵과 생선이 빵과 포도주로 바뀌었지만, 메시지는 동일하다. 주님의 만찬에서 모두가 똑같은 음식과 음료를 충분히 나눠 먹는다. 예수의 이런 ‘먹을 것’에 대한 비전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문제 삼은 것이다. 코린토의 신앙공동체에서 주님의 만찬을 축하 할 때, 노동하지 않는 부자들은 일찍 도착해 상류층 음식을 먹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노동을 끝내고 늦게 도착했을 때는, 남은 것으로 먹어야 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1코린 11,20-22)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때, 예수 생전에, 죽은 뒤에, 부활하신 뒤에 예수와 함께 했던 모든 식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곳에는 오병이어의 식사, 성만찬의 식사, 엠마오의 식사, 갈릴래아 바닷가의 식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언제나 매일같이 충분한 양식”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주렸을 때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16,12) 그러나 이 양식은 이렇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매일의 양식이 충분하다는 점, 각자가 얼마를 거두든 각자에게 똑같은 양이 돌아간다는 점, 하루 밤이 지나면 상하기 때문에 다음 날까지 저장하지 않는다는 점, 안식일에는 양식이 주어지지 않지만 그 전 날에 두 배로 주어진다는 점, 그러나 안식일 전날 거둔 양식은 다음날까지 썩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고]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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