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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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한상봉
  • 승인 2018.02.2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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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4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이름”은 그 당사자의 정체성이나 평판을 뜻한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불이 붙어서 타고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느님과 마주친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알려 주었다.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하느님에 대한 시각적인 역설이라면, 하느님의 근본적인 이름은 언어적인 역설이다. 그분은 당신 이름을 밝히셨지만 동시에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하느님의 정체를 알려거든, 그분은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그분은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이름이라고 설명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5)

그렇다면,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집주인인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그 백성들이 계승할 때 그렇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르는 자식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명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공평과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3-15)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33-34)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이 모든 명령은 안식 규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3)

하느님의 창조는 흔히 오해하듯이 6일간 이뤄진 것이 아니라 7일 동안의 직업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면서, 다른 중근동 지방의 창조설화에서 보는 것 같은 피흘림이 없었다.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이며, 안식년과 희년으로 이어진다.

안식일은 예배를 위한 정해진 날이 아니라, 본래부터 노동에서 쉬는 날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이름은커녕 우상의 이름을 부르는 짓과 다름없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을 찬미하여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탈출 23,12-13)

안식일은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평등과 정의의 면류관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집주인뿐 아니라 가축과 노예, 아이들과 더부살이하는 사람들 모두가 평등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안식년은 매 7년마다 지켜져, 땅을 쉬게 하고, 부채를 면제하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슈퍼 안식년으로, 모두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공평하게 분배받은 제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노예들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해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은 그 백성들의 거룩함 안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억압받는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을 뜻한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로마인 에멜리우스 수라는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의 <로마사 개요>를 인용하며, 앗시리아와 메대인,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에게 이어서 세계의 패권이 로마로 넘어왔다고 했다. 로마제국이 다섯 제국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 다니엘은 그들의 술잔은 깨어진 잔이며, 위대한 다섯 번째 왕국은 로마제국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고 선포했다. 다니엘에게 앞선 네 개의 제국은 땅을 위협하는 바다의 혼돈에서 솟아난 흉악한 짐승들이었다.(다니 7,3참조) 그리고 하느님 왕국을 가져오실 분만이 “사람의 아들(인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제국들은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왕국(Kingdom of God)은 “영원한” 나라이다. 이제 불의한 세상은 끝장이 나고 공평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종말론이 생겨났다. 여기서 종말론(eschaton)은 세상의 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 불의와 억압의 시간이 끝나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cosmos)이 아니라 ‘시대(aion)의 종말’이다. 세상의 파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정의와 비폭력의 세상으로 변혁되는 것을 뜻한다. 즉, 부패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대청소”이다. 이제 평화가 찾아온다.

“그분께서 수많은 백성 사이의 시비를 가리시고
멀리 떨어진 강한 민족들의 잘잘못을 밝혀 주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
(미카 4,3-4)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땅은 모두에게 똑같이 속할 것이며, 벽들이나 담들로 나뉘어지지 않을 것이다. 생활은 공동으로 할 것이며, 재물도 분할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없을 것이며, 폭군도 노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무도 더 이상 크거나 작지도 않을 것이다. 왕들도 없을 것이며, 지도자들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 평등할 것이다.”(시빌의 신탁 2,319-24)

이 나라를 가져올 분을 히브리어로 ‘메시아’(messiah),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christos)라 부르는데, 그는 종말을 위해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대리자를 뜻한다.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이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 왕과 같이,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올 분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하느님의 대청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개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는 오직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변혁적 개입이 늦어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를 통한 갱신운동을 시작했다. 정화된 사람들이 상당수 준비되면 하느님은 지체 없이 오시리라 믿었다.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고 말했는데, 이것은 본래 예수의 오심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오심을 기대한 발언이다. 그리고 요한이 시대한 하느님은 상당부분 복수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그런데 요한에게 온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복수하는 통치자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체포해 마케루스 요새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다. 이 현실을 지켜 본 예수는 자신의 비전을 말하게 되었을 때 요한과 다른 음성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세례자 요한은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가 이제 임박했다고 선포했으나, 예수는 그 나라에 여기에 현존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안티파스가 여전히 갈릴래아의 왕이고, 빌라도 여전히 유대지방의 총독이고, 농민들은 가난과 불의와 제국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소리인가?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 나라를 기다려왔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개입을 원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협력을 기다리신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이미 그 나라를 살아냄으로써 그 왕국을 세우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는 이곳에 있다는 전갈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자렛이나 가파르나움에 정착하지 않고, 제자들을 사람들에게 파견한다. 그들이 병자를 치유하고, 치유 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그런 상호성 안에서 하느님나라의 현존을 드러내게 하였다. 예수는 결코 다윗 왕 같은 ‘전사(戰士)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예수의 비폭력적 종말론에 대한 강력한 증인은 역설적으로 빌라도 총독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공개적으로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예수가 로마법과 질서에 저항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총독이 예수 일행을 일망타진하려고 들지 않은 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협력 없이는 시작되지도 않고, 계속되지 못하며, 완결되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에서는 하느님을 부르며, 후반부에서는 우리를 부른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뜻”은 예수가 처형되기 전에 올리브 나무들 사이에서 고뇌로 기도할 때 나타난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러면,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을 뜻하셨을까? 이를 두고 교회전통의 대속신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지만, 어떤 처벌도 이처럼 무한한 불명예를 씻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이면서 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보속을 위해 적합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즉, 죄 없는 예수가 인류를 대신해서, 또는 대체해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은 복음서에 없다. 예수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했지, 우리 대신 죽겠다고 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갈 때도 제자들을 떼어내고 혼자 가지 않았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예수가 말했을 때, 너희들 대신 십자가를 나 혼자 지겠다는 말은 전혀 없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 몫의 헌신을 요구했다. 예수의 죽음은 제국의 정상적인 폭력의 결과였으며, 하느님 편에서 그런 폭력을 반대하신다는 증언이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렇게 산 결과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공평과 정의를 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평판이다. 그 평판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으로 확립된다. 그 나라가 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땅을 위한 영원한 모델이지, 우리가 사는 땅의 미래 운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주 오해되는 것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언어 사용 때문에 비롯되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5번 언급하고 있지만, ‘하늘나라’는 31번이나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현실을 뜻한다. 마태오복음의 이 구절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 19,23-24)

[참고]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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