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 꽃길은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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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이 내 세상>, 꽃길은 없을지라도
  • 김원
  • 승인 2018.02.2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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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의 문화칼럼]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볼까? 아니 우리는 영화관에 갈 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고 나서 새삼스레 드는 생각이었다. 영화 한 편을 굳이 선택해서 보러 갈 때는, 아마도 여러 가지 기대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기대를 한 편의 영화가 다 만족시켜주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으레 기대하기 마련이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영원한 과제이자 고충일 것이다. 관객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개봉작을 고를 때면 이런 설렘은 버릇처럼 나온다.

 

관계 회복의 쓰라림과 아름다움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은 개봉 2주차부터 1위 자리에 올라 이른바 ‘역주행 흥행’을 기록 중이다. 전직 권투 선수 형(이병헌 분), 서번트증후군 동생(박정민 분), 두 아들을 사랑으로 보듬는 엄마(윤여정 분)의 사연을 전하는 가족 영화로 <역린>(2014)의 각본을 쓴 최성현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다.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때는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는 한물간 전직 복서 '김조하'. 우연히 17년 만에 헤어진 엄마 '인숙'과 재회하고,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따라간 집에서 뜻밖의 동생 '오진태'와 마주한다. 라면 끓이기, 게임도 최고로 잘하지만 피아노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서번트증후군 진태. 조하는 입만 열면 "네~" 타령인 심상치 않은 동생을 보자 한숨부터 나온다. 하지만 캐나다로 갈 경비를 마련할 때까지만 참기로 하고 불편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개봉 직후에는 ‘익숙한 웃음과 감동 코드’ 식의 촌평을 많이 들었던 작품이다. 영화가 “좋긴 한데 뻔하다”는 그 평가들 또한 뻔한 채점(?)기준들에 의한 ‘익숙한’ 말들로 채워져 있기도 했다. 반면 관객들의 호응은 뜨겁다. 따뜻하고 정겨워서 반갑다는 소감이 많다. 익숙하기에 친근할 수 있다는 최고의 장점을 잘 살린 것일 수도 있겠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이견 없이 훌륭하다는 찬사 일색이었다. 정말로 보탤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연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 연기가 어떻게 가능했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배우들이 서로 얼마나 긴밀히 ‘관계성’을 고민하고 실현시키려고 애썼는지를, 조금의 틈이나 일그러짐도 없이 빚어낸 어떤 ‘세상’의 견고함에 대해서였다.

주인공 셋은 ‘세 식구’라기에도 ‘세 모자’라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다. 처음에는 그랬다. 남이나 진배없었다. 아니 남만도 못 했다. 아내를 때리고 아들을 때리는 아버지. 그 속에서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감옥 가고, 아이는 혼자 먹고 자고 운동하다가 권투선수가 된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그렇게 살았다. “미국 나이로 서른여덟”에 엄마를 어쩌다 다시 만났지만, 비록 영화 소개에는 ‘17년만의 재회’라고 하지만, 조하의 말을 들어보면 “군대시절 길에서 우연히 본 게 전부”였다. 스물여섯 살인 진태의 나이만큼의 세월 동안 그들은 소식 모르고 살았다.

조하는 정말 거칠게 살아온 사람 같다. 버림받은 채 잡초처럼 살아온 티를 팍팍 낸다. 엄마에게 사랑 받으며 자란 진태의 옛 사진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 관객은 그의 가슴 속에 이는 소용돌이를 느낀다. 헝그리 정신의 대표적 종목인 권투 선수 역할을, 현재 ‘최고’의 자리에 있는 배우 이병헌이 완수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는 결핍과 갈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분노조절이 안 되는, 안쓰럽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꺼려지는 조하 그 자체였다. 영화 속 조하는, 그리도 진저리치게 아버지의 폭력을 증오하지만 저도 모르게 폭력에 중독돼 있는 사람이다. 맞거나 때리는 것 외의 감각은 둔화돼 있다. 화가 나면 때리든 맞든 부수든, ‘매질’을 통해서만 정신을 수습하려 드는 오랜 버릇이 툭툭 튀어나온다.

 

‘내 세상’ 넓혀가기

진태는 전혀 다른 체질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투과시킨다. 대단히 섬세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한 진태는 마치 조하를 거울처럼 비춘다. 조하로서는 그저 일상적인 몸짓일 뿐이지만, 진태는 조하가 뿜어내는 ‘화’의 기운을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감지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진태가 한 번 얼굴을 가격당한 후 쓰게 된 ‘아이언 맨 마스크’가 주는 의외의 효과를 느끼게 된다. 진태가 언제 마스크를 쓰고 언제 벗는지, 마스크를 쓰고 상대방을 대할 때 ‘방어’의 몸짓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에 눈길이 간다.

조하의 숨결만 거칠어져도, 진태는 바로 그 기운을 느낀다. 얼핏 “네”만 반복하는 것 같지만, 진태는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의 유연한 자기보호의 결을 보여준다. 말은 (간혹)부드럽게 할지라도, 속에 분노가 늘 똬리를 틀고 있는 조하에게는 참으로 같이 지내기 어려운 상대이기도 하다.

맞고 살다 도망쳐 새 살림을 차렸던 엄마 또한, 조하를 만난 후 뜻밖의 태도들이 튀어나온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자기 안에 내재된 폭력의 잔재가 발견된다. 진태한테는 쓰다듬는 손길 하나조차 조심하며 애지중지하지만, 조하에게는 쉽게 오해하고 막말을 퍼붓고 상처 주는 말로 가슴을 후벼 판다. 맷집 좋은 조하는, 이종격투기 현역 선수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도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건만, 엄마의 “형편없는 인간” 소리에는 까마득히 절망한다. 그런 조하를, 그 순간에는 달래주지도 못한다. 어떤 오래된 ‘흔적’에 엄마 스스로도 흠칫 놀라는 듯하다.

성당에서 성가대원을 하며 진태가 성가를 반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천국’이었던 그녀지만, 해결하지 못한 큰아들과의 상처는 어쩌면 그 시절 그대로였다. 서로를 폭력으로 옥죈 문제적 가족이었던 옛날의 세 식구 시절로 단박에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조하는 순간 ‘때리던 전 남편’으로 엄마의 망막에 맺혔을 수도 있다. 자초지종을 미처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뺨을 때리기도 한다. 조하로서는,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픈 매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이가 없어서 뺨을 감싸 쥐고 있는 동안, 이 조그맣고 나이든 기운 하나 없는 여인의 현재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뺨을 때리는 손의 힘은 또 얼마나 약했을까. 조하는 비로소 한줌도 안 돼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저 멍해진다. 그렇다. 그 힘없는 매질에서 정확하게 ‘환자’임을 느낀 것이다. 조하가 세상을 터득하고 깨달아온 방식대로라면 말이다.

좀 행복해지는가 싶으면 ‘익숙한 불행’이 닥친다고, 그래서 ‘한국형 가족 드라마’가 싫다고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으면서 ‘가족 드라마’의 위력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중병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봐야 하지만, 그래도 꼭 불행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작고 소소한 교감으로 가득했던 일상을 함께 산 기억이 있으니까. 그리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것도 헛되지 않았다고. 그들 인생의 어떤 옹이나 비틀어짐도, 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의미를 품고 있었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몰랐던 상태에서 진태 역을 맡아 전문 피아니스트를 방불케하는 연주 장면을 소화해낸 배우 박정민은 입이 딱 벌어지게 한다. 손 대역 정도는 (당연히)쓸 것이라고 여긴 관객의 예상을 깨며 뜻밖의 감동을 준다. 배우에게 그 정도까지의 힘겨운 노력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괜스레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지막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장면은 소름마저 느껴질 정도다. 진태와 혼연일체가 되어 행복했다는 배우 박정민의 소감 또한 인상적이다.

바보는 왜 때로 감동적일까.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열정과 매진이 주는 투명한 매혹이 잠시나마 숨을 고르며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곳곳에서 그런 장면과 마주치게 한다. ‘높은’ 자리에 잠시 올랐다가 추락한 사람들이 자기를 가다듬어야 할 때도, 실은 바보스러움에서부터 재출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아니스트 한가율(한지민 분)이 주는 메시지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소확행’이라는 낱말이 있다고 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살아서 사소하게라도 행복하자’는 일종의 다짐으로도 들린다.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혹은 죽어야 올 것 같은 극단의 사랑이나 영광은 필요 없다는 단호함이기도 하다. 중요한 의식 전환이라고 여겨진다. 한없이 관념적이고 커져만 있는 상념의 고리를 끊고 실제적 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살아낸 우리가, 지금 무엇보다 소중히 챙겨야 할 것은 이런 감각일 것 같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소소함’일 것이다.

영화 말미에 장례식장에 조문 온 한가율의 다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영화 내내 치렁치렁한 긴 드레스로 다리를 한사코 가렸던 그녀는, 수많은 불특정다수를 만나게 될 그 열린 장소에 다리가 드러나는 검은 레이스 치마를 입고 왔다. 상대적으로 짧아서 ‘로봇 다리’인 오른쪽 다리가 훤히 보인다. 그런데도 한가율은 아무렇지 않게 서서 웃고 있다. 영화가 굳이 자세히 비추지도 않아서 잘 보아야 보이는 작은 변화였지만 울림이 있었다.

엄마가 늘 듣고 흥얼거리시던 들국화의 노래를 피아노로 치며 아픈 마음을 추스르는 동생, 그런 동생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조심조심 건너는 형. 그들의 대조적이지만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 주는 작은 위안. 이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면 조마조마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관객은 믿어보고 싶다. 잘 살 거라고. 신파라고 해도, 동화라고 해도 좋다. 따뜻하고 사람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이런 게 영화를 보는 기쁨이 아닐까.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가 세상 잇기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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