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 뼈 속에 갇힌 주님 말씀이 심장에서 불처럼 타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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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뼈 속에 갇힌 주님 말씀이 심장에서 불처럼 타올라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2.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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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철저한 전통주의자들-1

정열적이고 창조적이며 때때로 수수께끼 같은 성서의 예언서들은 고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도 다만 예언자들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스며들어 우리의 안전 장치를 타파하게만 하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을 때 그가 느꼈던 힘에 대해 예레미아 예언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 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 두자’고 하여도,
뼈 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7-9)

이 설명은 확실히 극적이다. 모든 예언자들이 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반항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예언자의 반항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모든 세대에 예언자를 보내시지만, 모든 세대는 그들을 거부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양쪽으로 날을 세운 검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때로는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예레미아 예언자

예언자,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들

예언자들은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불편한 얘기를 한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당신 삶을 한번쯤 의심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까지 그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죽음을, 당신의 삶을 내려 놓을 것을, 자신을 잊으라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직 그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당신은 예언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아직 듣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다. 그 분은 많은 예언자들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배척당하고, 죽음을 당한 것을 알고 계셨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우리와 같이 교회에 다니는 종교적인 사람들, 회당에 나가는 사람들한테 다가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착한”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껄끄러운 얘기를 듣기엔 자신들의 종교적인 성향 안에 너무 안주하며 살았다.

예언자는 미래를 아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직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기 보다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들은 말씀을 전한다. 예언자는 진실을 듣고 세상에 그것을 알린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자주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며,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제도와 관습에 도전하는 예언자

예언자들은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제도신학에 그들은 거의 언제나 맞서 왔다. 제도화된 전통은 늘 지나친 권력을 휘둘러 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만약 관습에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경우 그것은 우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우상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제도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제도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제도화된 관습을 수호하던 당시 제도권 지도자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최후의 예언자이시자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 자신도 사제들과 성전의 율법학자들에 강하게 맞서시다 결국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날의 남녀 예언자들 역시 종종 성직자들과 교회 제도권과 마찰을 빚곤 한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The Prophet Hosea by Duccio di Buoninsegna, ca. 1311

예언자, 사회적 양심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충실함이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충실함.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매우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양심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믿고 싶어하나, 어떤 때는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의 길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향하는 길을 우상화 시키며 그것을 법과 규율로 정하여 소중히 여기고 사회적 존경이라는 후광을 덧씌운다.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일 뿐이다. 얼마 안 있어 이사야가 그랬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나타난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들이 나를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일 따름이다.” (이사야 29,13).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

예언자의 말은 양심을 찌르고 우리를 진리로 다시 불러들인다. 양심에 대한 그같은 호소의 기반에는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는데 이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또 다른 측면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 이 주제를 특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바람기 있는 그의 아내 고매를 다시 맞으라고 명하셨다.

호세아는 시키는대로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매는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쳤다. 주님은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하셨고, 호세아는 충실하게 순종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의 아내는 또 다른 남자와 정사 행각을 벌였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호세아는 그 일이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주님께서 아내를 계속 사랑하도록 분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예언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과 바람을 피우며 야훼께 불충을 저질렀다; 그러나 야훼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그 분께로 다시 되돌아오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시다. 결국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종인 이 사람에게 당신이 하고 계신 일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마침내 그 분께로 되돌아오기를 인내롭고, 성실하게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낭군이라고 부르리라. 나는 이스라엘을 내 것으로 이 땅에 심으리라. 로루하마를 귀여워해 주고 버린 자식을 ‘내 자식’이라 하리니, 그제야 입을 열어 ‘나의 하느님’하고 부르리라.”(호세아 2,16. 23).

언제나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호세아 이야기는 예언자적 통찰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그들은 사건이 발생한 후 지혜를 얻는다. 예언자들은 과거를 돌아보고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신 일들을 본다.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의 행태, 당신만을 의지하라는 부르심, 그리고 당신에게, 오직 당신께 자신의 삶을 의탁한 이들에게 선사하시는 예측 불가능한 삶을 인지한다. 그들은 이 모든 양상들을 출애굽의 사건 속에서, 가나안 정복, 다윗 왕국 건립이라는 사건들 속에서 본다.

그것은 또한 구원의 양상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언제나 하느님이 부르시고, 언제나 하느님이 새 삶을 주신다. 과거를 돌아보며,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그러한 양상에서 벗어날 때면,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때면 생명 대신 죽음으로 치달았다는 것 또한 보았다: 사람들은 불의, 핍박과 파괴를 체험했다.

다음으로, 예언자들은 그들의 통찰력으로 현재를 살핀다. 그들은 현재의 상황을 관찰하여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어떤 양상을 감지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행태를 띠는가 아니면 우리를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죄의 행태를 보이는가? 만일 후자의 양상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면 그들은 외친다: “이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다! 당신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언자들의 통찰력은 일종의 선견지명이 된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를 때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일들이 벌어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들 앞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머지않아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고통스러워했다.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예언자

예언자들은 과거를 숙고하고 현재에 대해 말하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현재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자주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얘기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사실들은 다분히 비애국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유다의 국가 이익에 위배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항상 그런 사실들을 얘기하곤 한다. 그것은 늘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것인 동시에 국가주의로 이끄는 모든 것들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수세기 동안 국가주의를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해 오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반성서적이라고까지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하겠는가? 성서시대의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모두 낙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 양상을 보았기 때문에 늘 낙관적일 수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계속해서 개입하시고 또 인간의 의심과 저항을 극복하시고 구원과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것을 보아 왔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믿었다.

그들이 비록 “정신 차시리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오!,”라고 외쳤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정신을 못차리고 말씀을 듣지 않더라도 결국 하느님께서 승리하시리라는 자신감을 마음 속 깊숙히 담고 있었다. 그러한 확신 없이 그들은 예언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진리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언자들이 가끔은 회의적인 낙관주의자들이었음을 인정하자! 그들은 사람들이 변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앞에 닥친 미래에 대해 비관했다. 그러고,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모든 계획들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그들은 하느님 홀로 하느님이심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언자적인 통찰력으로 그들은 모든 저항, 어리석음, 파괴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결국 승리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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