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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 속에 하느님이 누워 계신다<우리 아버지>, 프란치스코 교황 & 마르코 포짜, 한마당, 2017

“하늘에다 틈새를 만들어 보라! 거대한 성채마저 무너질 것이다. 갈라진 틈새에 하느님이 잠복하고 계시다.”

이탈리아 국영방송 라이(Rai)에서 2017년 생방송 프로그램 ‘주님의 기도’를 진행한 마르코 포짜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종과 가진 생방송을 토대로 리졸리(Rizzoli) 출판사에서 <우리 하느님>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입술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버지’를 발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답게’ 기도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아니고, 우주에 계신 분도 아니고,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다. 내 발걸음에 동행해 주시는 가까이 계신 분이다.

“물론 그분은 내 아버지시지만 이웃의 아버지도 되시고, 마찬가지로 내 형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면 그분께 ‘아버지’라는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언제나 희망이 되시는 우리 아버지”
_프란치스코 교황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자기 아들에게 사랑만 주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달라는 아들의 건방진 행동을 벌하지도 않고, 그 아들한테 자기 몫의 유산을 그냥 내맡겼을 뿐 아니라, 집에서 나갔는데도 그냥 둘 정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인간 방식으로 사는 아버지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는 저 비유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아버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방식대로 아버지십니다. 선하시고,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 무방비하시고, ‘사랑한다’는 동사를 실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으신 아버지십니다. 반항아 아들이 온갖 망나니짓을 다 저지르고서 결국 고향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아버지는 인간이 만든 정의의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그냥 용서해줄 필요만 느꼈습니다. 아들을 품에 끌어안고서 아들이 없던 그 오랜 세월, 마냥 아들이 보고 싶었다는 점만 일깨워줍니다. 정말 가슴 아프게 보고 싶었다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부정(父情)으로 보고 싶었다고.

하느님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입니다. 당신 자녀들을 상대로 이런 방식의 사랑을 간직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니!

아마도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 신비의 핵심을 일깨우면서, 예수님이 입 밖에 내신 ‘아빠Abba’라는 아람어 단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성 바울로는 서간집에서 두 번에 걸쳐 (로마 8,15; 갈라 4,6) 이 주제를 다루면서, 두 번 다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은 채 남겨 둡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피어나던 형태 그대로, ‘아빠’로 남겨둡니다. ‘아버지’라는 말보다 훨씬 친근한 용어입니다. 혹자는 ‘파파papa’ 또는 ‘밥보babbo’라고 옮기기도 하지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고, 적개심을 품을 수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은 없다’고 공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 없이 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없다면’ 결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없이 못 사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없이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위대한 신비입니다. 이런 확실성이 바로 우리가 갖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모든 청원에 이런 희망이 서려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예수님은 우리더러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 속에 스스로 가두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라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분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온갖 필요와 제일 분명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청하라 하십니다. 즉 음식, 건강, 일자리로부터 용서받고 유혹에서 버텨 낸 일까지, 이 모든 게 우리가 사고무친한 처지가 아님을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늘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를 절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감옥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
-마르코 포짜

<우리 아버지>, 프란치스코 교황 & 마르코 포짜, 한마당, 2017

교황님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미지 하나가, 생각 하나가 그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역사의 진짜 주역은 걸인이다! 걸인의 얼굴은 하느님의 얼굴이기도 하다는 말을 나는 이해한다.

구걸하는 하느님. 무력함 속에 능하신 하느님. 감옥의 냄새나는 누더기 속에 몸을 웅크리신 하느님. 구걸한다는 단어는 궁핍의 동사다. 가난뱅이와 일상, 도회지 회랑 밑에 등 굽은 여인,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남자, 철창에 갇힌 죄수, 난파선을 타고 밀려드는 난민들, 장애인들, 실업수당을 받는 자들 ... 우리 가까이에 보이는 삶의 군상이다. 예수님을 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하느님은 분명 구걸하는 하느님이시다.

“그에게는 풍채가 없고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 53,2-3) 프란치스코가 사용하는 문법은 이것이다.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의 말대로 “놀람의 하느님, 틈을 보이는 하느님, 잠복하고 있는 하느님, 예배를 받고 우리에게 먹히는 하느님”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하느님이 나를 놀라게 하시도록 잠자코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도록 마음을 열어놓고, 하느님이 우리한테 마음을 쓰시게 허락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느님만이 우리의 속사람부터 겉사람까지 다시 젊게 만드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가난뱅이 속에 하느님이 누워 계신다. “어느 감방도 하느님이 거처하지 못하게 막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투옥당한 사람에게 전하는 프란치스코의 선포, 그것은 자비다! “감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날 적마다 생각을 모아 아버지께 기도한다면, 이 동작은 ‘거룩한 문’, 곧 희년의 성문을 통과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철창 뒤의 자유이자 안전의 보장이기도 하다. 나는 걸인의 비천한 혈통에 속하는데, 늘 그 점에 긍지를 느낀다. 걸인의 유일한 재산은 ‘결핍’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쫄로로 순례하고 바르비아나로 순례하여 두 사제의 무덤을 방문해 반문해 기도하고 사죄하였다. 크레모나 교구의 보쫄로 본당의 프리모 마쫄라니(Primo Mazzolari, 1890-1959) 신부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저항하고 신앙인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으나 교구에서 핍박을 받았다. 그리고 피렌체 교구의 바르비아나 본당의 로렌조 밀라니(Lorenzo Milani, 1923-1967) 신부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외치며 정규교육을 받지 못 하는 하층민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다가 바티칸 보수층의 금서조치를 받았고, 신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7년 6월 20일 이들의 묘소에 방문해 기도하면서 사죄하고 이들을 복권시켰다.

교황은 죄인들의 황폐한 감옥에서 세족례를 거행하였다. 람페두사 항구에 들어가서 난민들이 타고 온 배에 오른 교황, 결혼한 사제들이 모여 사는 집 언저리를 지나가는 교황, 구걸하는 교황, 그분은 구걸하는 하느님의 우체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은밀하게 잠복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구원받는 길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더 멋진 인간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구걸하는 하느님의 침투에 익숙해지도록 단련하시라! 적어도 우리가 아직 발에 신발을 신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셨으면 좋겠다.(탈출 12,11 참조) 그래야 즉각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곁에 계시겠다는 것이다. 어느 적절한 기회에 어떤 방법으로 하실지는 하느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게 사랑일 거다.

걸인을 두고 한 마디 더 하련다. 빵, 빚, 유혹을 피하기, 악마는 욕설로 쫓아내기.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나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선에 맞추고 싶다.

함께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치면서, 마르코 포짜 신부는 이 기도를 암송하기 전에 사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구절을 상기하며 ‘마치 발끝을 들고 목소리를 낮추게 만드는 신기한 구절’이라고 전한다. 그 기도는 우리가 다 함께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 용기가 필요하죠. 내 뜻은 이러합니다. 정말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믿기로 작심합시다. 나와 동행해 주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내가 청하는 것은 다 귀담아들어 주시고, 나아가서는 들의 꽃보다 더 잘 입혀 주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믿음을 갖는 일, 이것도 하나의 거창한 모험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던가요? 그래서 모두 다 함께 기도를 바칩시다. 함께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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