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분] 예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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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분] 예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8.02.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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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예루살렘- 3

공관 복음서의 전체 구성을 장소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고 부활하였다. 공관 복음서의 각권은 크게 보아 예수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행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 이야기의 구성에서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이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장소의 대조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가 공적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갈릴래아였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르 1,14 병행). 이렇게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곳이 갈릴래아다. 갈릴래아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을 들었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곳도 갈릴래아였다. 그곳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어 하느님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었다.

갈릴래아. 사진출처=pixabay.com

갈릴래아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신 예수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간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복음서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룬다. 예루살렘은 어떤 장소인가? 그 도시는 이스라엘의 중심이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동시에 예루살렘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있는 장소이다. 갈릴래아에서 예수가 활동하실 때에 예루살렘은 이미 적대적인 곳으로 소개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예수를 비판한다(마르 3,22 이하 병행). 예루살렘은 예수를 배척하고 죽인 장소이다. 갈릴래아가 나라의 변두리, 가난한 이들의 땅이라면 예루살렘은 나라의 중심이고 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층의 도시이다. 예수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복음서 이야기에서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의 대조는 단순한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 대조만을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신학적인 대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장소, 즉 공간적 배경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반대자들과 논쟁한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와 제자들의 공동체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예루살렘은 배반의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길은 결국 십자가를 향한 길이다. 그 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투신하시는 예수의 길이다.

 

예루살렘.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서의 이야기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끝나는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파국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다시 갈릴래아를 말한다. 빈 무덤에서 한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10 병행). 예수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다시 부른다. 이것은 새로운 만남으로의 초대이다. 그 만남의 장소는 첫 만남의 장소였던 바로 갈릴래아이다.

이와 같이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인 배경은 복음서 사건들의 기본 틀을 제공한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의 의미에 관하여 각 복음서들이 강조하는 점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루살렘은 구원의 역사의 중심이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곳, 성령 강림이 일어난 곳, 복음 전파가 시작되고 교회 공동체가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의 관계에 있어서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 사이에는 몇몇 차이점이 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공생활 중 단 한번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가시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 번이나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다. 이와 같이 복음서의 전체 구성에서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은 기본적으로 큰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각 복음서 마다의 특수성도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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