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목자의 피리 "내 십자가 반대편이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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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목자의 피리 "내 십자가 반대편이 비어있다"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2.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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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5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당신은 스코틀랜드나 예루살렘에서 목자의 피리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소리는 좀처럼 잊을 수 없고, 마음을 홀리며 견딜 수 없게 만들어서 그 소리를 따라가고 어디에서 오는지 보러 가야 한다. 선한 목동의 피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소리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비참해 질 것이다. 우리는 목자의 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 소리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음악은 메아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기도와 관계가 있다. 우리 삶의 이야기는 “피아트”와 “알렐루야”의 이야기다. 피아트(fiat)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 "예"(Yes)라고 하는 것이고, 이 "예"는 자주 고통스러운 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끊임없는 기도 없이 살아낼 수 없다. 우리 힘으로 이 단어들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이것은 언제나 인류의 가장 큰 유혹이 되어왔다. 수 세대에 걸쳐, 우리는 바벨탑을 세워 천국에 닿으려고 애써왔다(창세 11,1-9). 매일, 매순간, 우리는 똑같은 오래된 사과를 문질러서 하느님이 되려고 한다(창세 3,4.5). 우리의 추락한 인간 본성 안에 자리 잡은 이 이상한 성향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말한 이 말씀들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한다. “아니요!” 우리는 항의한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 없이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요 – 저를 보기만 하세요. 저는 당신의 승인을, 은총을, 구원을 살 수 있습니다 – 당신은 항상 저에게 선물로 줄 필요가 없어요. 저는 당신을 모든 것의 창조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내 작은 힘으로 하고 싶어요.”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가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자신의 작은 힘으로 그 이상의 것을 기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일단 깨달으면, 우리는 하느님께 수많은 것을 드릴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콜로 1,24). 우리는 “그분을 고대할 수 있다”(시편 37장).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를 구분할 수 없게 되도록, 뜨거운 물에 녹는 설탕처럼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다.

기도는 하느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받아들이는 전적인 믿음이다. 우리는 그분의 모상, 그분의 형상이며, 그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기도는 우리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된 죄인으로서, 언제든지 하느님과 우정 관계를 깨뜨릴 수 있으며 심지어 그 깨짐을 기뻐하기도 한다. 이것을 깨우치면, 기도는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반이 된다.

가끔씩 이런 저런 때에 우리 모두가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불안감이 있다. 쉴 수 없는 다리, 쉴 수 없는 마음, 분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우리는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을 거부하는 마음, 분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우리는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을 거부하는 마음, 무엇을 찾지만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계속 찾는다면 하느님께 고맙지만, 너무나 자주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진정한 갈망이 아닌 것에 만족하고 만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염원을 성적 욕구, 결혼 욕구와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성욕은 강력하고 결혼은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욕구들이 우리를 본질에서 밀어내고 문제를 혼란시킨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결합이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결혼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결혼을 해도, 독신이거나, 사제, 수녀, 혹은 다른 어떤 소명도 거쳐가야 하는 비소유와 자아의 죽음 같은 똑같은 영의 노고를 거쳐야 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지 않는 한, 하느님과의 일치에 지름길은 없다. 가끔씩 그분은 지름길을 마련해 준다. 때때로 그분은 문자 그대로 영혼에 나타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자 목자, 성녀 젤마나도 그 예다. 수비루의 벨라뎃따 성녀도 또 다른 그런 경우다. 하느님은 원하시는 대로 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통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고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도는 하느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인간존재의 열정적인 갈망이다. 이 일치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가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은 천천히 얻어진다. 이 모든 것에는 깊은 신비가 있고, 우리는 신비들을 밝히는 데에 별로 성적이 좋지 않다. 우리는 원하신다면, 하느님이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설명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인내가 열쇠다.

매일매일, 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에 필요한 대가를 알게 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삶의 여정을 가든 간에 이런 고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가르쳐주는 하느님의 방법이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우리가 성장하도록 각성시키는 모든 것은 만일 우리가 "예"라고 말한다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갈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영적인 성장은 반드시 우리가 이룬 일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때때로 영적인 성장은 단순히 앉아서 우리가 성취하려고 했던 것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부터 온다. 혹은 하느님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일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선명하게 보는 것을 그때에는 희미하게 알았다 – 즉 하느님께서 실제로 나를 붙잡아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네가 찾고 있는 일치를 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십자가 반대편은 비어있다. 와서, 거기에 못 박혀라. 이것이 우리의 합일이다.”

그런 초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저는 이 십자가에 올라갈 용기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믿고 도움을 청할 은총을 줄 뿐 아니라,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긴다. 그분의 갈망은 그분과 우리의 두 갈망이 만날 때까지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인간의 기도와 하느님의 갈망이 일치의 한 짧은 순간에 한데 모여서, 우리의 갈망을 훨씬 더 돋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맛이고, 그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황폐한 상황에 우리가 예라고 말하는 용기를 줄 것이다. 목수 예수가 우리 각자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십자가 위의 일치로 가는 다음의 디딤돌에 예라고 말하는 용기를.

기도는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그 일치에 대한 굶주림이다. 기도는 우리 가슴의 고동과 함께 우리의 피 속에서 고동친다. 기도는 하느님 이외에 아무것도 잠재울 수 없는 갈증이다. 기도는 우리의 온 몸을 발끝으로 세우고, 마치도 우주를 만질 것처럼 우리의 손을 위로 뻗치는 것과 같다. 기도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처럼, 움직임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움직임이다. 오로지 다시 찾기 위하여 뻗치고 찾고, 붙잡고, 발견하는 움직임이다:

“나의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네. 그러나 나의 연인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네!”(아가 5,6).

기도는 나락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바닥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닥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벼랑 끝에서 균형을 잡고 있으며, 거의 뛰어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다시 뒤로 물러서며 수년을 보낸다. 어떤 순간에, 굶주림은 너무나 커지고 갈증 역시 목이 타는 것 같다. 우리는 뛰어내린다. 나락 속으로 뛰어내리지만, 그곳에 나락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이고, 오직 하느님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만을 발견한다. 잠시 동안 우리는 그분의 팔 안에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나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우리를 벗어나는 것 같기에, 다시 한번, 그분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기도는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너무나 이상하지만, 기도의 움직임은 삼위일체가 머무는 우리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탈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와야 한다.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는 장애물은 결코 우리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탈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리기 위하여 우리의 내면을 비로 청소하는 것과 같다. 누가 낙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에 항상 머무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죽음은 우리 자신과 내면에 머무는 삼위일체 사이의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멀리 있는 어떤 별에 닿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에 쓰여있는 말씀처럼,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2-14).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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