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정의가 앞서야 참된 기도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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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정의가 앞서야 참된 기도가 따라온다
  • 한상봉
  • 승인 2018.02.12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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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2

시문학과 전통_형식

주님의 기도는 내용과 형식에서 성서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예언서와 시편, 잠언과 같은 성서의 시문학 전통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듣는 이들의 마음을 직접 움직인다. 성서의 시문학은 병행구를 주로 사용하는데, 생각의 진폭을 넓히는 기법으로, 마음 속에 메트로놈을 만드는 것이다.

<동의어 병행구>는 명상을 위해 언의 반복을 통해 미끼를 던져주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

<대구적 병행구>는 부정적인 표현과 긍정적인 표현을 교대함으로써 내용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

<점강적 병행구>는 내용은 비슷한 병행구를 반복하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는 딸 것이 고 밭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할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쿡 3,17-18)

주님의 기도에서도 전반부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에서 ‘나라’를 거쳐 ‘뜻’으로 이어지고, 후반부에서는 ‘양식’에서 ‘빚(죄)’를 거쳐 ‘유혹(악)’으로 이어진다. 이 두 부분 사이에 <동의어 병행구>가 나타나며, 각 부분에서도 <점강적 병행구>도 나타난다.

시문학 전통_내용

시문학 전통과 크게 시편과 예언서 부류로 나뉜다. 시편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요청’과 ‘감사/찬송’의 기도가 대부분이다.

[청원] “하느님, 비탄 속에서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으소서.
원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제 생명을 지켜 주소서.”(시편 64,2)

[감사/찬송]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시편 30,13)

신앙인들이 시편처럼 청원과 감사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무엇인가 하느님께 간청하고, 성취된 일에 대해 감사하고, 다가올 미래의 것을 위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식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이때 하느님은 흥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찬양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불평과 청원을 통해 하느님께 요청하는 기도로 넘쳐난다. 또한 찬양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넘쳐난다.

그러나, 시편에서 예언서로 넘어가면 양상이 달라진다. 이제 하느님께(to God)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위해(for God) 말하는 사람들로 관심이 옮겨간다. 예언자들은 땅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급진적 비전 속에서 반복해서 ‘공평과 정의(justice & righteousness)’를 강조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착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마라.’”(예레, 22,3)

예언자들은 기원전 700년대의 예언자들인 아모스, 호세아, 제1이사야, 미카에서 기원전 600년대 말엽의 예레미야를 거쳐 기원전 500년대 말엽의 제3이사야에 이르기까지 ‘분배 정의’를 선택하고, ‘예배기도’를 거부한다.

[부정]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긍정]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예언자들은 정의와 기도를 결합하지 않고, 왜 정의가 기도/예배에 맞서는 것으로 선포했을까? 그것은 당대의 기도에 ‘분배 정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이사 1,15)

어느 예언서에서도 하느님은 “정의가 없는 곳에서는 기도를 거절하신다”고 흔히 말하지만, “기도가 없는 곳에서는 정의를 거절하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기도는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백성들의 응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앞서야 참된 기도가 따라온다. 그리고 참된 기도를 하는 자는 정의를 행한다. 그래서 사실상 참된 정의와 기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정의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상태에서는 그분께 진지하게 기도할 수 없다. 한편 그런 하느님께 성심껏 기도한다면, 그분에게서 정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받는다.

[참고]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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