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죄인을 부르는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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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죄인을 부르는 하느님 나라
  • 한상봉
  • 승인 2018.02.05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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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9-13)

마태오복음 6장 9-13절과 루카복음서 11장 2-4절, 디다케 8장 2-3절에서는 예수가 직접 알려주었다는 ‘주님의 기도’가 약간 다르게 실려 있다. 80년경 마태오, 루카복음서가 쓰여진 비슷한 시기에 유대교 회당에서 매일 암송하던 ‘18개조’의 기도문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유대교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던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이 기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기도문은 내용과 형식에서 상당히 다르다.

 

by 조르주 루오

장황한 찬사가 없는 예수의 기도

이 기도문의 앞 세 소절은 이러하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아브라함의 하느님, 에사오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천지의 창조자시고, 우리의 방패시며, 우리 조상들의 방패이십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아브라함의 방패시여!

당신은 굳세고 강하셔서, 영원하시며,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산 자들을 붙드시며,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옵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는 분이시여!

당신은 거룩하시며, 당신의 이름은 경외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 외에는 어떤 신도 없습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주, 거룩하신 하느님이시여!”

그러나 예수의 기도는 간소하다. 유대교 기도문의 역사철학과 민족정체성을 담은 모든 말들을 다 잘라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달랑 하느님을 향한 직접적인 부름만을 남겨놓았다.

마태오복음에선 이 기도에 앞서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집회서에서도 “기도할 때에 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마시오”(집회 7,14)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교의 기도문이 장황한 것은, 당시 지식엘리트였던 바리사이들의 경향을 반영한다.

당시 유대교 회당의 주역은 바리사이들이었고, 그들은 촌락의 유지들이었으며, 이들은 사제들에게나 적용했던 규율을 대중적 규율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바로 이게 예수에게는 걸림돌이었다. 예수가 보기에 바리사이들의 세밀한 율법규정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법이었다.

‘주님의 기도’ 도입부가 “아버지” 하고 짧게 호명되는 것은 예수가 율법에 의해 추방당한 자들의 시선에서 하느님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들이며, 그래서 하느님을 장황하게 칭송할 겨를이 없다. 그저 ‘아버지!’하고 짧게 부를 뿐이다. 예수 주변에는 죄인들, 즉 거지와 창녀와 세리들이 모여 있었고, 그분은 그들과 식탁에 앉았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이들은 바리사이가 만들어놓은 ‘(유대교) 내적 국경’ 외부로 밀려난 자들이다. 반외세 민족주의자들이었던 바리사이는 ‘바깥에서 들어온 외세’ 로마에 대적할뿐 아니라 ‘내부의 외세’인 죄인들도 솎아냈다. 그들에게 죄인들은 ‘유대민족을 식민화 시킨’ 내부의 적이다. 그 내부의 적을 몰아내고 남은 자들을 통해 민족사를 재건하겠다는 게 바리사이즘이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죄인들을 부르는 나라이다. 이는 유대교의 배제주의에 대한 항거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의 짧은 부름 구문은 승자의 시선이 아니라, 추방당한 자들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기도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죄인들의 하느님은 실상 자신의 아들을 지극히 낮은 곳으로 추락시켰다. 예수는 낮은 자이면서, 낮은 자의 친구이면서, 지극히 낮은 자의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그가 죽을 때 권력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제자와 친구들도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도망갔다. 그분의 비장한 삶을 생각한다면, 그분이 수사 없이 “아버지!”하고 한 마디 내뱉을 때의 간절함이 묻어 나온다.

주님의 기도에는 '감사의 기도'가 없다

루카복음은 단순히 “아버지!” 하고 부르지만, 마태오복음서와 디다케에서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부가어가 첨가되었다. 이는 시리아 남부 유대공동체의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한번 하늘의 표상이 이렇게 드러난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지금 여기 땅에서의 ‘하느님 부재’를 드러낸다. ‘주님의 기도’에는 감사기도가 없다. 백성들의 끝없는 고난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기도문에서는 그 절망의 골이 그리 깊지 않다. 18개조 기도문 가운데 9-18조가 감사의 기도이다. 첫 번째는 ‘재물의 축복’이다. 제9조는 “올해도 우리를 축복하여 주소서. 오 주, 우리의 하느님이시여. 그리고 당신의 보고에 있는 재물로써 이 세상을 만족하게 하여 주소서.”이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유대민족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있다거나, 자신들이 유대교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곧 이 기도문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과 땅은 대립한다. 땅에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절규하며 기다린다. 유대교 당국의 추상적인 거창한 감사와 달리, 예수는 삶의 질곡 속에서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린다.

당시 로마황제가 파견한 총독들과 헤로데 정부는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이고, 무분별한 부역사업을 강행해 왔다. 게다가 전염병과 기근, 기타 자연재해 등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고난은 촌락을 해체시킬만 했다. 그래서, 헤로데가 죽은 기원전 4년뿐 아니라 수없이 민중봉기가 발생했으나 로마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대중화 하면서 회당으로 중심으로 촌락을 통합해 나갔다. 그것은 곧 ‘고통의 체제’를 ‘종교적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그들의 고통은 ‘죄’ 때문이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대중의 억울 감정을 잠재우는 심리적 기제를 발동시켰다.

그래서 예수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바리사이적 해법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바리사이들은 예수마저 “죄인과 사귀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딱지를 붙여 배제시키려 했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체제 안에서 ‘주님의 기도’는 저항하는 민중의 ‘공동기도문’이 되었다.

[참고]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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