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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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2.0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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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 하

사무엘서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와 제도, 성령이 주는 자유와 사회의 타성 사이에서 긴장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애초에 유랑하는 민족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랐다. 판관 시대에 그들은 위기 때마다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를 따랐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기 전 10세기경에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면서 큰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민족으로서 결속력을 갖기 위해 좀더 많은 위계체계와 조직, 심지어 관료제도까지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떤 기도 단체라도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면서 이와 같은 긴장을 경험한다. 이 같은 사실은 새 예루살렘 공동체 설립 초창기부터 일해 온 사람들에게 아주 실감나는 것이다. 한 방에서 몇 명이 모여 기도할 때는 참 좋았다!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며 우리 갈 길을 갔고,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단체는 커지게 되었다. 우리는 모임을 더 자주 가졌다; 이것 저것 챙길 것이 많아졌다; 조직이 더 많이 필요했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는 주님께 의탁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기가 아주 쉬워진다.

우리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교회를 이해하고 참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2000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거기엔 항상 교회 내 성령의 활동과 제도 사이의 긴장이 형성되어 왔다. 분명히 우리는 바빌론의 매춘부이기도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부이기도 했다. 우리는 분명 충실하지 못했으나, 그 불충실함 가운데서도 다수의 성실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앙의 통찰력은 인간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본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데 묶기 위해 거대한 사회적 구조물을 개발하지만, 주님은 늘 예언자를 보내시어 신앙의 핵심인, 신뢰와 충실함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신다.

 

Guercino, 'Saul tenta di uccidere David con la lancia', 1646, olio su tela, Galleria Nazionale di Arte Antica di Palazzo Barberini

군주국가를 원하는 백성

성서로 되돌아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을 군주국가로 바꿀 것을 건의하면서 이 긴장이 본격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온 이후 이날 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사무엘 상 8,7-9)

새 제도는 사람들의 나약함에 대한 용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필요했다. 야훼는 사무엘을 그들의 왕으로 뽑아 주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였다:

“만일 너희가 야훼를 두려워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또 너희 뿐 아니라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야훼 너의 하느님의 뒤를 따르면 좋으려니와 너희가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야훼께서 손을 들어 너희와 너희 왕을 치실 것이다.”(사무엘 상 12,14-15)

다시 말해 야훼는 그 분의 예언자를 통해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왕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에게 너무 의지하지는 말아라! 왕과 백성 모두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여야 하고 성령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교회의 비극, 제도화

교회의 비극은 우리가 이 지혜를 종종 잃어버린다는데 있다. 주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대신 우리는 교회의 문제를 전문가, 관리들에게 맡기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프로그램을 짜고 전문가를 영입한다. 다른 문제가 생기면 다시 새 프로그램을 만들고 다른 전문가를 데려 온다. 얼마 안 있어 그 모든 프로그램을 관장할 부서가 필요하게 되고, 운영할 사무실과 전체 업무를 원활하게 굴러가게 할 직원을 필요로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 조직은 자생력이 생기고, 제도화된 관료체제는 해를 거듭하고, 세대를 거듭하여서 필요성의 여부와 관계없이, 적합성의 여부를 떠나 제 스스로 굴러간다. 우리는 제도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었고 주님께서 손수 뽑으신 왕에게조차 주지 않은 권한을 제도에 위임하게 되었다.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규모가 꽤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들기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됨을 알았다.

다른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자신의 힘만을 믿으려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며,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성령의 인도에 내맡김 없이 해결하려고 한다. 그룹들간의 갈등, 우선 순위에 대한 불일치, 서로서로에 대한 불신마저 느끼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혹은, 좀 나은 경우, 그런 일이 불거지기 전에- 우리는 모임을 가진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온다.

모임 첫 한 시간동안은 우리 마음을 그 분께 열고 우리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이 우리 주님이 되시도록 맡긴다. 그 기도의 시간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고 우리 마음을 밝혀 주시고, 우리를 겸손케 하시고 용기를 주신다. 성령 안에서 그런 만남을 한 후, 우리는 논쟁으로 몇 시간이나 끌 수 있는 문제들을 삼십분 안에 해결하곤 한다.

일상적인 본당 사목위원회, 학교 이사회, 교구위원회의 모임과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은 몰려와 성모송을 잽싸게 읊고 나서 두시간 동안 사람들을 녹초로 만들고 때로는 헛수고만 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린다. 우리는 그 일의 성패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노력이 교회를 쇄신하고, 우리의 결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열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Samuel anoints David, Synagogue at Dura-Europos

다른 왕이 필요하다

하느님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성서는 간략하게 적고 있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매일 매일 겪는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이 특히 업무상 모임을 가질 때 참되고 깊은 기도를 드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더 많은 능력을 경험하고 우리 노력에 의한 결실을 더 풍부히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주님보다는 우리 자신을 더 많이 믿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울이 바로 그랬다. 그는 왕이라는 직분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주관하려 하였다; 그는 하느님 노릇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주님은 왕권을 박탈하셨는데, 그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려서였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뽑은 성령의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다른 왕을 찾아 나섰다. (그 때 사무엘은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그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왕을 찾아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주님은 그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 보내어 그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하신다. 이새는 그의 아들 중 맏이부터 차례 차례로 불러 들였다. 그들은 모두 크고 힘이 세며 잘생긴 청년들이었으나 야훼는 사무엘에게, “저들의 얼굴이나 키를 보지 말라.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판단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는 마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상 16,7).

사무엘은 그들 모두를 내보냈다. “다른 아들은 없소?”라고 예언자가 이새에게 물었다. 그는 아들이 한명 더 있음을 알았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사무엘은 “그를 보고 싶소. 그를 데려 오시오.” 사무엘이 가장 어린 아들인 다윗을 보자마자 야훼는 그에게 “바로 이 아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그 자리에서 바로 다윗을 모든 사람 위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주님의 선택은 우리와 다르다

이것은 주님의 선택이 우리 자신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이것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드러나고 있는 또 다른 위대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그를 중요한 인물로 만드신다. 하느님은 에사오가 큰아들이고 야곱이 약삭빠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에사오 대신 야곱을 선택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부족 중 가장 힘이 약한 벤자민 지파에서 사울을 선택하셨다.

이제 하느님은 평범한 가장의 가장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아들인 다윗을 선택하셔서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하셨다. 예언자 사무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우리의 결정들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주님은 확실히 다윗과 함께 계셨다. 17장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예리고 몰락의 이야기의 주제와도 흡사한 것으로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그 장애물이 성이 아니라 성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 뿐이다. 삼손 때와 마찬가지로 이 블레셋의 거인에 대한 묘사 역시 어느 정도 역사적인 사실에 기인하고는 있을 테지만 이야기가 기록될 즈음에는 거인의 키가 이미 10피트나 된다고 부풀려져 있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그러나, 꽤 단순하다. 그것은 어른을 상대하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다. 그것은 병사와 싸우고 있는 양치기의 이야기다. 그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것과 일치하고 주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이 그 불가능을 어떻게 가능케 해주시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다윗은 골리앗을 맞아 싸우러 나가면서 하느님께 의탁한다. 겁에 질리고 피곤에 지친 사울은 (그는 그때까지 다윗의 임명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중무장을 시키려고 했으나 다윗은 그것이 필요 없었다. 야훼가 그의 갑옷이 되어 주실 것이다. 사울은 그에게 커다란 무기를 주려고 했으나 다윗은 거절한다. 대신 그는 새총에 쓸 돌을 하나 주워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도움으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어른의 일을 해낸다.

하느님은 번개나 다른 것으로 골리앗을 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하도록 하셨다. 이 부분에 와 우리는 신약에 이르러 완전히 꽃피는 육화 개념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성경의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믿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윗은 자기 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바쳤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다윗은 주님을 사랑하였다

다윗은 항상 주님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였다. 요즘의 아이들이 기타를 치듯, 다윗은 하프를 키며 노래를 불렀는데, 대부분이 하느님께 바쳐진 것이었다. 성서의 시편들 중 상당수는 그가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주님 앞에서 춤까지 추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 군중들 앞에서 계약의 궤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그의 부인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그는 주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바보처럼 보일 것이라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다음에 전례에 참석하게 될 때엔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주교와 교구 신부들은 왜 다윗처럼 되지 못할까? 우리는 왜 그처럼 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다윗도 완벽하지는 못했다. 후에 그는 부하의 아내인 바세바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 다윗은 그녀의 남편이 확실히 전사 할 수 있는 전쟁터로 그를 파견하였다. 야훼는 예언자 나단을 보내어 다윗의 죄를 꾸짖었고, 그는 다른 많은 사람과는 달리 그 꾸짖음을 받아 들였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야훼께 불충했음을 깨달았으며, 우리가 시편 51장이라고 알고 있는 시로 자신의 참회를 노래했다.

다윗이 오늘날의 교회의 귀감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변화의 시대에 그는 시행착오를 거쳐 배우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왕으로서 그는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과 더불어 힘과 권위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로 상징되는 성령의 인도에도 귀를 기울인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유례 없이 이 시기 동안 제도와 성령의 인도는 서로 협력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건설하였다. 왕과 예언자 모두 서로의 말을 경청하였고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로부터 배웠다. 이렇게 한데 모임으로써 힘이 생기는데 그 힘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고 공통의 진리를 추구할 때 생기는 것이다.

나는 집이 필요 없다

사무엘 하권에서는 또 다른 큰 주제가 나타난다: 은총이다. 이는 선물을 의미하며 우리가 이미 그 예를 보아 알듯이, 그것은 바로 선물을 뜻하며, 그 때까지 이스라엘이 이룩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사무엘 하권에 가서는 더욱 뚜렷한 예를 보게 된다.

7장에 이르러 다윗은 블레셋을 마지막으로 무찌르고,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그 곳에 멋진 궁전을 세운다. 그렇지만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커다란 천막 안에 모셔져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예언자 나단에게로 가,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 둔채 그대로 있소” (사무엘 하 7,2). 다윗은, 다시 말해, 하느님을 위한 집, 성전을 짓고 싶어한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주님은 왕의 요청에 대한 답을 예언자에게 전하신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 안에서 살아 본적이 없다...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 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네 앞에서 펴 없애 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 않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해 주리라. 또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주리라.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구해 내어 평안함을 주리라. 또 너에게 집을 지어주리라. 네가 살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손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나 그가 주권을 튼튼히 하리라."(사무엘 하 7,5-12).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가? 그 분은, “나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은 좋으나, 나는 필요없다. 그 대신 내가 너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항상 무엇을 하길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그것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시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가 교리로 배운 사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얘기하고 있다. 은총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 그것은 사랑 받고 있다는 걸 완전하게 온통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감히 청할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는다. 그 분은 그 삶을 자유롭게, 자진해서, 후하고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의 능력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마음을 열어 놓고, 그것을 받고, 믿으며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은 살아있는 성전을 원한다

사람들은 늘 하느님을 위한 성전과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분은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 우리를 당신의 성전, 살아 있는 성전,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3,16-17).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성전이며, 곧 지상에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성 역시 그가 살고 있는 건물이 아닌 다윗의 가문, 다윗의 후손들이며 다윗의 전통을 이어받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주님께 의탁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은총이 다윗의 성, 하느님의 백성,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한다. 교회가 창조된 것은 은총의 선물이며, 몇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까지 그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윗의 시대에 와서 우리는 이때까지의 양식이 역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판관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그들에 대한 야훼의 사랑을 잊어버려, 핍박을 당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구원하시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구원이나 해방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느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다. 하느님은 해방자다; 하느님은 자유롭게 해 주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그것도 항상 먼저 하신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것이 은총의 주제다. 사람들이 주님께 등을 돌려 죄를 짓게 되면 나쁜 결과를 맞게 되곤 하는데 악은 그 속성상 악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후회하고 스스로를 돌이켜 선한 일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자신들의 회개를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 전부터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를 진정한 회개로 이끄는, 영혼에 참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의 꺼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자각이다.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체험을 한 후 가능하며, 그 체험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할 수 있게 된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수세기 후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분께 응답하며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으로 당신께서는 우리를 먼저 처음부터 지켜보고 계셨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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