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부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
상태바
김유정 신부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
  • 김유정 신부
  • 승인 2018.02.04 2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4 : 한국교회의 수행과제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매주일 미사를 성실하게 참례하던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는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으니 “중산층의 심리적 위안을 위한 종교 집회에 내가 왜 나가느냐”고 말했다 한다. 이 학생의 말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에게 천주교회는 그런 곳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일까. 신자들은 점차 고령화되고 교회는 보수화되어 가는 듯하다.

한 외국인 선교사제는 당신께서 한국에 도착했던 60~70년대에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만 성당에 나왔고, 부자들은 ‘감히’ 나오지 못했는데,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하셨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말은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최근의 교회 문헌들에 비추어, 한국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쇄신되어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한 선배 사제가 ‘빈민 사목’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기에 ‘교구 내에 빈민 사목을 몇 분이 하시느냐’고 선배에게 여쭈었더니, 일곱 분이 하신단다. ‘그럼 다른 분들은 다 무슨 사목을 하시나요?’라고 되물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어느 새 ‘빈민 사목’은 교회의 특수 사목의 한 분야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밀양 송전탑 공사, 강정 해군기지 건설, 세월호 참사, 한일 위안부 협상, 백남기 농민의 선종, 고고도미사일 방어 체계 기습 배치 등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약자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정부 권력으로부터 배척되었기에 더욱 소외된 분들에게 교회는 누구였나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제와 수도자, 교우들을 비롯한 교회 내의 일부 위원회와 단체들이 그분들과 연대하고 그분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과연 전체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고엘’의 역할을 해야 마땅했건만 혹시 강도당한 사람을 지나쳐간 사제나 레위의 모습은 아니었던가. ‘정치적 사안이니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교회 안팎의 훈계를, 복음의 명령(마태 25,31-46)보다 우선시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지난 2017년 추계총회 중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건의한 안건을 받아들여,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약자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이들과 연대하기로 하고, 그 대상을 해마다 선정해 구체적 사회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내년은 그 대상을 ‘농어촌 이주민 노동자’로 선정하였는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이들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다른 약자들의 처지에도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언제나 복음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드러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지가 있습니다. 곧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입니다.”(<복음의 기쁨>, 195항) 

한편, ‘2018년 제51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문’의 주제 역시 ‘이민자와 난민’인데, 교황은 이들을 위한 환대, 보호, 양육, 통합을 강조한다. 담화문 중 "관상의 시선으로"(con sguardo contemplativo) 이민자와 난민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표현이 눈에 띤다.

관상(觀想, contemplatio)은 기도의 한 종류로서,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이해된 하느님 현존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상 많은 종류의 관상기도가 발달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은 오직 한 가지 관상만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② 사회교리 교육과 전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을 동반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속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필수적인 부분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백주년>, 5항)라고 강조하였다.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은 부차적인 사안이나 활동이 아니고, 교회 사명에 덧붙여진 것도 아니며… 교회의 봉사 직무의 핵심”(<간추린 사회교리>, 67항)이다. 2014년 방한 중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중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부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2014.8.14.)

성 요한 23세 교황은 사회교리에 대한 교육이 성직자 양성, 모든 종교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메스미디어를 활용하여 사회교리가 전파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러한 사회 교리 분야가 갈수록 더욱더 많이 연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각급 가톨릭학교에서 특히 거룩한 신학교에서 이를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기를 권고한다. 본인은 물론 일부 신학교에서 이미 그러한 교육이 훌륭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 나아가, 본인은 이 사회교리 분야가 각 본당이나 단체에서 평신도 사도직을 권장하고 가르치는 종교 교육 계획에 추가되기를 바란다. 또한 현대의 모든 대중 매체들, 즉 일간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 전문가들이나 대중들을 위한 교리 연구 서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등을 통하여 사회 교리가 널리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가 개정되어 출판된 것도 최근의 일이므로, 성직자들 중 많은 수가 신학교에서 체계적인 사회교리 교수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계속해서 새로운 회칙과 ‘평화의 날 담화문’ 등을 통해 발전하고 있으므로, 사회교리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성직자들은 물론 신자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③ 사회복음화와 교회 쇄신

지난 2013년 3월,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개최되기 직전 열린 추기경단 회의에서 호르헤 마리아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신학적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la Iglesia mundana que vive en sí, de sí, para sí)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la Iglesia evangelizadora que sale de sí)가 되어야 한다.”며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그 자신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듬 해 반포한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7항)라고 선포하였다.

언제나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현 교황의 입장과 이를 지지한 세계 추기경단의 선택 안에서 일하신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식별하고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야 한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가 교회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이기도 한 복음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성찰과 식별은 더 없이 중요하다.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복음의 기쁨> 176항)으로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을] 올바로 다루지 않으면 복음화 사명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계속 왜곡될 위험”이 있다.

이 왜곡의 위험은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원을 개인적, 영적, 초월적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사회적, 육체적, 역사적 차원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사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조는 세상을 구원의 장해물로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신 세상(요한 1,3 참조),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신”(요한 3,16) 세상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사회 분야를 복음화한다는 말은 복음에서 찾아낸 의미와 자유의 힘을 인간 마음속에 불어넣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인간다운 사회를 증진한다는 뜻”(<간추린 사회교리>, 63항)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모든 부문 곧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언론 등 다양한 영역과 자연 생태가 복음화의 대상이 된다. 이는 교회의 관심이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의 과제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통합적 견지에서 바라본 ‘인간발전’이, 복음화 사명의 중심 주제여야 함을 뜻한다.

④ ‘민족들의 발전’을 위한 노력

2016년 1월 1일 ‘세계평화의 날 담화문’은 다소 충격적인 말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반대로, 우리는 무관심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렇기에 하느님의 최대의 관심사인 우리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며,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과 연민, 자비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권고가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정보를 잘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중독이나 된 듯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비극에 대하여 막연한 생각만을 지니며 그것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연대의 정신으로 의식을 개방하지 않으면, 바로 우리 시대의 특징인 정보의 증가가 문제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확실히 정보의 범람은 인간을 마비시켜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상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의 불행을 아파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돌보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책임인 것처럼 여깁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6년 제49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

우리는 메스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고 있지만, 어느새 정보를 얻는 것에만 중독이 되어 있다. 정보를 갖고 있는 것과 관심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정보도 평등하지 않아, 부자 나라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는 자세히 보도가 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한 사고는 단신으로 처리되거나 보도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권층의 부와 다른 이들의 빈곤함 사이의 격차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1967년 반포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지적이지만, 이 간격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점점 더 확장되어 가고 있다. 분단의 상황을 60년 이상 지속하면서, 다른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남북한을 둘러싼 강대국들에 대해서만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짙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자선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에 대한 개선으로 이어져야 하듯, 가난한 나라의 형제들에 대한 관심은 해외원조로 그쳐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을 위한 창조된 재화와 소유권’,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질문과 개혁에의 동참으로 이어져야 한다.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은 오늘날의 교회에 맡겨진 특별한 소명이다. 오늘날 남북한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심각한 민족적 ‧ 사회적 상처를 안고 있다. 한국전쟁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민족이 외국산 무기로 서로를 죽인, 민족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아픔이고 상처이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으면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상처는 국가적 차원에서 치유가 필요한 아픔이다. 그러나 과거 남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 연장을 위해 이 상처를 이용하고 북돋아왔다. 지난 60여 년간, 남북한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 상처를 치유하고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 왔는가, 아니면 전쟁의 위험을 불사하면서까지 시민들의 상처를 자극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해 왔는가.

가장 강력한 안보는 군수업자들이 조종하는 무기 생산과 군비 경쟁이 아니라 평화 협정이며 궁극적으로는 통일이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협력하고 기여해야 한다. 일부 신자들이 군비증강과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에 찬성하는 데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한국 교회는 교리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한다.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사목헌장>, 81항)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언제나 재천명해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⑤ 생태적 회심을 향한 공동체적 노력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과제들은 ‘생태’라는 말로 수렴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에 반포한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하여 자연 생태, 경제 생태, 사회 생태, 문화 생태, 그리고 일상생활의 생태를 망라하는 ‘통합 생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생태’는 결국 ‘함께 살자’는 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함부로 부리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존재를 존중하고 돌봄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세상이고, 예수께서 외치신 세상이다. 가장 약한 존재들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섬기는 것은 특별한 성인들의 덕(德)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의 보편적 의무이다.

오늘날 세계는 매우 중대한 생태위기에 처해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로 인해 이상기온과 지구 온난화 등 심각한 기후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일차적으로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지난 30년 간 기후 변화로 인해 인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의 수가 6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피해는 결국 온 인류와 모든 생명체, 그리고 지구 전체에로 향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예일대학이 198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생태의식이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비해 더 낮다는 충격적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로부터 24년이 지난 2013년에 미시간 주립대학이 다시 조사를 하였는데, 지난 20여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같았다고 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는 말씀을 잘못 이해해 온 역사가 바뀌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 가톨릭신자들의 생태 의식은 어떠한가? 조사된 바를 접하지 못했으므로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얼마나 읽히고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한다. 교황께서 회칙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바가 한국 교회 내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는 교황께서 취임미사 강론 때부터 줄곧 강조해 온 바이기도 하다.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가 피조물과 우리의 형제자매를 돌보지 못할 때마다 파괴의 길이 열리고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슬프게도 역사의 모든 시기마다 죽음의 음모를 획책하고, 파괴를 일삼고, 인간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헤로데’가 존재해 왔습니다. 경제, 정치, 사회 생활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선의의 사람에게 간곡히 요청하고자 합니다. 피조물의 ‘보호자’, 자연 안에 새겨진 하느님 계획의 보호자, 인간의 보호자와 자연의 보호자가 되도록 합시다."(<찬미받으소서>, 246항)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온 우주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도 현존하시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당신의 온유로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
저희 안에 당신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돌보게 하소서.
저희를 평화로 채우시어
그 누구도 해치는 일 없이
저희가 형제와 자매로 살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당신 눈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인
이 지구의 버림받은 이들과 잊힌 이들을 구하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이 세상을 보호하며, 세상을 약탈하지 않도록
오염과 파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심도록
저희 삶을 치유해 주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만져 주소서.
당신의 영원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저희의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경외로 가득 차 관상하도록
저희가 모든 피조물들과 깊이 일치해 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치소서.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저희의 투쟁에서
제발 저희를 지탱해 주소서.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