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는 굶주림처럼
상태바
[기도] 기도는 굶주림처럼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2.04 2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도의 핵심으로-4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7-19)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묻는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 왜냐하면 “기도는 굶주림”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기도에 대한 굶주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다. 아이가 또 다른 아이와 가까운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와 가까웠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많은 것을 했다. 심지어 공놀이도 함께 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음식도 함께 먹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지만, 하느님은 계속 우리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우리는 말로 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런 후 말로 하는 기도도 떨어져 나가고 우리는 새로운 땅에 있게 된다 – 그것은 묵상의 땅이다. 묵상은 마치도 우리를 깊게 감동시키는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친구가 말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음미한다. 우리의 연인은 이 친구, 그리스도가 되어 우리는 복음을 열심히 읽으며 매 말씀을 묵상한다. 복음이 우리가 선호하는 기도가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묵상은 낡은 옷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이제 우리는 관상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마치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묵상에서는 우리의 지성이 대답을 추구했다. 이제는 하느님 그분 자신이 복음의 이런저런 구절을 밝혀준다. 우리는 하느님께 푹 빠져있다.

이렇게 하느님께 푹 빠져 있은 다음에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머리로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오직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난 일은 우리 자신이 기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된 사람은 말씀과, 성자와 깊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질 때,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가 된다. 물론 우리는 실질적인 필요에 관해선 머리를 쓴다. 집은 청소해야 한다. 매 순간의 과제는 항상 있다. 삶은 전혀 중단되지 않는다.

기도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작은 일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의 깊게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의 공정하고 비판적인 머리는 끊임없이 신앙의 문제를 해부하고 분석하며 합리화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마음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가 된다는 의미다.

기도는 고통이다. 기도는 “함께 - 고통받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고통에 관하여 듣게 되고 우리는 마치도 죽은 목숨 같다. 우리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테러리스트들에 납치된 인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암으로 죽어가는 여인이 된다. 전 세계의 고통이 우리 어깨 위에 놓인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고통을 나눌 뿐이다. 이것이 기도가 된다는 의미다.

지구의 또 다른 구석에서,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나눈다. 갑자기 우리는 한 밤중에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아마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빈 것처럼 느낀다. 그러면 자신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우리 자신이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낀다. 유혹이 우리를 덮치고, 수천 개의 의심의 혀들이 불길처럼 우리를 핥는 것 같다. 이때는 우리가 의심에 가득 찬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된다.

때때로 우리는 지옥, 인간이 만든 지옥의 심연 속에, 무신론의 심연 속에 빠져 움직일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무신론자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의지로 그곳에 내려간다. 우리의 신원은 기도다.

기도는 움직임이고, 마음의 기동력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삶 동안 기도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영원히 하느님께, “영광, 영광,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천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가?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끌린다. 광야의 체험은 우리를 더 빨리 기도로 이끌 것이다. 갑자기, 우리는 그분이 항상 그곳에 현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할 수 없다고? 그분은 그곳에 앉아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로마 8,26).

우리가 살아가는 것, 고통받는 것, 의심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할 때, 하느님은 그곳에 계신다. 그분이 그곳에 계시면, 모든 것이 그곳에 있고, 우리는 기도가 된다. 기도가 될 때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가 될 것이다. 하느님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그렇게 죽을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몸에 복음의 옷을 입고, 그분의 얼굴 앞에서 기도가 되는 사람들에게 그런 힘을 주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육화의 신비와 만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명백한 것의 신비다. 그것은 사랑의 신비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한 아기가 동굴에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일상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 모든 여관들이 꽉 차 있을 때 동굴에 간다는 것보다 더 평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육화는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한 걸음씩 그리스도의 육화를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매 걸음마다,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명백한 것의 신비는 큰 망치의 결정적인 타격처럼 우리를 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뻔한-과 우리의 신비를 몸소 짊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몸을 입음으로써, 그분은 우리들을 그분이 오시기 전의 상태보다 더 신비스럽게 만든다. 그분은 육화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실존을 거룩하게 만든다.

사람이 되는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이 되는” 인간의 신비가 기도 안에서 만난다. 성부께 드리는 성자의 기도와 형제인 그분께 드리는 사람의 기도가 만나는 것이다. 육화에 의하여, 하느님-사람은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 하느님과 사람은 이처럼 기도 안에 일치하고,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의 기도 안에 합한다. 그분 안에서, 사람도 또한 기도가 된다.

열쇠는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그리고 명백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예수의 부활 이후,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성사들을 보자. 그리스도교 권에서 너무나 평범한 세례성사를 보자. 아기. 물. 기름. 솜. 사제. 대부 대모. 모두가 만질 수 있고, 매우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 성사의 깊이를 재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세례 받는 것이 실제로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가?

견진성사는 성령에 사로잡히는 실제다. 우리는 하느님의 세례 받은 자녀로서 그 실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는가?

그분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입게 될 힘 그리고 우리 역시 견진성사를 통하여 입을 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힘은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분명하고 평범한 것들을 이해한다면, 이 힘은 우리의 신비를 심화시킨다. 우리는 영광과 권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한한 신비들을 알아듣는 능력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머리로만 믿고 우리의 혀로 고백하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신비는 육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복음을 입어야 하고 육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열쇠를 가진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충만하게 기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신비와 사람의 신비가 만날 때에 기도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힘과 영광은 우리가 매일 더 그리스도가 되도록, 매일 아버지께 가는 길이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힘과 영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이고 또한 우리 역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보내졌으며,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권능과 신비는 우리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하도록 주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권능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비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