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부 "구원은 사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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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신부 "구원은 사회적이다"
  • 김유정 신부
  • 승인 2018.01.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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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4 : 사회교리와 영성

구원의 사회적, 육체적, 역사적 차원

"구원, 곧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현실화되고 전달되는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전인적(全人的)인 것이다. 이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구원이며 인간의 모든 차원들 즉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영적이고 육체적인, 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차원들을 모두 포함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8항, 발제자의 번역)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per tutti gli uomini) 것이고 전인적인 것(di tutto l’uomo)이며 우주적(universale)이고 통합적(integrale)으로서, 개인적, 영적, 초월적인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육체적, 역사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의 구원적 사건으로 체험한 이집트 탈출은 사회적‧정치적 사건이었고, 육체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등),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고 말씀하실 때, 당대의 사람들은 구원의 사회적, 육체적, 역사적 차원을 경험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는 구원을 개인적, 영적, 초월적 차원으로만 국한하여 이해하여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신자의 영혼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구원에 대한 위와 같은 오해는 ‘종말론적 영성’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종말론적(終末論的)인 면과 육화적(肉化的)인 면을 갖고 있다. 종말론적인 영성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인간 구원과 성화 등을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이끌어간다. 종말론적인 영성에서는 현세에서의 이탈, 침묵, 관상, 자기 성화, 완덕 등을 강조한다. 이런 뜻에서 종말론적인 영성을 ‘그리스도 빠스카 신비의 죽음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영성’이라고 한다. 자기 포기, 자기 희생, 고행, 고신 극기 등을 강조하는 이 영성은 교회의 보수적 · 전통적인 영성으로서 수도회의 경우, 특히 관상수도회는 종말론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삶을 영위한다.

종말론적인 영성이 현세 초월적인 반면에 육화적인 영성, 다시 말해 강생(降生)적인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여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강조하는 영성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이 세상,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화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하려는 영성이다. 육화적인 영성은 현세적인 일들을 긍정적으로 판단함으로써 현세의 어려움과 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이 영성은 세상의 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세상의 성화를 추구한다. 즉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건설하려는 영성이다.

종말론적인 영성이 그리스도 빠스카 신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인데 비해 육화적인 영성은 ‘그리스도 육화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이 육화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육화적인 영성은 사랑, 봉사활동, 헌신, 사회생활, 노동의 가치 등을 신앙 안에서 실천하고 강조하게 됨으로써, 결국 현세적인 면에 있어서 진보적이고 행동적인 특성을 지닌다.…

종말론적인 영성과 육화적인 영성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성소에 따라 이 두 영성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정대식, <영성생활>, 18-20.)

위의 구분을 따르자면 종말론적 영성은 사회 참여에 대해 소극적인 것으로, 육화적 영성은 적극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에, 둘 중 종말론적 영성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해로 시작되었던 초대교회에 이어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받게 되었던 세속적 특혜를 거부하고 시작되었던 초기 수도원 운동, 그리고 관상(觀想, contemplatio)을 상위의 가치로 삼아왔던 수도원의 영성 등은 종말론적 영성을 육화적 영성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에는 항상 일방적인 해석의 위험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는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을 사셨다

예수께서는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두셨는가? 종말론적 영성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고 육화적 영성이 예수님의 강생과 부활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종말론적이면서 지극히 육화적인 삶을 사셨고 그것이 그분의 영성이다. 문제는 그 중 한 측면만을 분리하여 오로지 그것만을 강조할 때에 발생한다.

"순교자들도 종말론적 영성을 살아가신 것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순교자들의 삶은 육화적 영성의 측면을 풍부히 내포하고 있다. 교황은 지난 2014년 시복식 미사 강론 때에 이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미사 강론」, 2014.8.16.) 

순교자들이 세상의 일에 대해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종말론적 영성을 사셨던 것으로 잘못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순교자들은 당대의 사회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기에 죽음을 맞으셨다. 세속 권력은 자신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체제에 해가 되지 않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이유가 없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도 당대의 기득권 세력이 유지하고자 했던 체제와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었기에 처형되었다.

‘순교’라는 종말론적 영성의 이면에는 체제에 도전이 될 정도로 강렬히 평등과 신앙의 자유를 삶으로 외쳤던 순교자들의 육화적 영성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종말론적 영성의 대표로 거론되는 수도회의 성인들은 대부분 수도회를 개혁하였거나, 세상의 쇄신을 위해 수도회를 창설한 분들이었고, 따라서 육화적 영성을 사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은 서로 다른 두 영성이 아니라, 예수를 본받는 한 가지 영성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올바른 종말론적 영성은 육화적이며, 올바른 육화적 영성은 종말론적이다. 잘못 이해된 종말론적 영성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잘못된 종말론적 영성의 폐해

잘못 이해된 종말론적 영성이 교회 내에 자리하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 한 가지 예로 중세 후기 유럽에서 발발했던 흑사병을 들 수 있다.

흑사병은 7천5백만에서 2억 명, 즉 유럽 인구의 30~5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전염 속도와 엄청난 감염자 수는 이후 유럽 역사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일련의 종교적 ‧ 사회적 ‧ 경제적 대격변을 촉발했다. 흑사병 후 성직자들은 이를 하느님의 처벌로 해석하며 설교했다. 유일한 보호책은 기도와 고행, 금욕, 세상과의 단절에 바탕을 둔 영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적 태도의 폐해는 엄청났던 것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도 지속되었다. 회칙 「어머니요 스승」에 등장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의 말씀은 이러한 태도가 당대에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반증한다.

"평신도 자녀들은 그 누구도 한갓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위한 일에서 그리스도인 고유의 활동을 좀 줄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날로 더욱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또 추진하여야 한다고 확인하는 바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영혼의 완성과 현세 생활의 속사, 이 두 가지는 상호 배치되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성 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254-255항; 숀 맥도나, 『공동의 집』, 36에서 재인용.)

 

사진출처=pixabay.com

사회교리와 예언적-비판적 영성 

한편, 영성신학자 필립 쉘드레이크(Philip Sheldrake)가 정리한 영성의 네 가지 유형들은 영성사 안에서 사회교리를 자리매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쉘드레이크는 모든 주요 종교들 안에서 네 가지 영성의 유형들이 발견된다고 보면서 이 유형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다. 네 가지 유형은 엄격히 구분되지 않고 어느 정도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① 수덕적-수도원적 유형(ascetical-monastic type) : 사막이나 수도원과 같이 특정한 장소를 중시하기도 한다. 자기부정, 금욕, 세상의 기쁨으로부터의 절제 등의 실천을 영적 성숙과 도덕적 완성의 길로 묘사한다. 물질과 육체로부터의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A.D. 300-1150)

② 신비적 유형(mystical type) : 관상을 통해 하느님 현존을 직관하려는 열망과 결합된다. 일상생활로부터 물러남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일상이 무언가 놀라운 것으로 변모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신비적 유형은 논증적인 이성과 분석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직관적 “앎”과 결합된다. 궁극적 목표는 영적인 조명(illuminatio)이며 존재의 심연으로의 연결이다. (A.D. 150-1450)

③ 능동적-실재적 유형(active-practical type) : 여러 가지 방법 안에서 일상생활을 영적인 길과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위한 일차적 상황으로 간주한다. 이 유형에서 우리는 영적 진리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일상사로부터 물러날 필요가 없다. 영적인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빌자면,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일상적 생활의 한 가운데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 영성 유형은 특별히 수덕적 삶에 봉헌되거나 집중적인 관상의 기회를 가진 집단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도달 가능하다. 이 영성 유형은 영적인 성숙을 일상적인 체험과 헌신,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를 포함한 활동들을 통해 영적인 성숙을 도모한다. (A.D. 1450-1900)

④ 예언적-비판적 유형(prophetic-critical type) : 이 유형은 영적 과업으로서 사회의 변혁과 사회 정의를 향한 뚜렷한 투신의 길에서, 단순히 이웃을 위한 실용적인 봉사를 넘어선다. 역사적으로 모든 영성 유형이 예언적이고 비판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예언적-비판적 영성에 대한 뚜렷한 관심과 ‘유형’으로의 발전은,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히 출현하게 되었다. (A.D. 1900- )

이 네 가지 유형 중 사회교리는 능동적-실재적 유형, 그리고 예언적-비판적 유형과 관련이 되며, 상대적으로 육화적 영성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예언적-비판적 유형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 전통에서도 등장하지만 20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유형으로 발전되는데, 그 이유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 구조의 재편과 이로 인한 노동자 소외 문제의 발생,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으로 인한 평화 문제에 대한 긴박한 관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의 사회교리 회칙 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교회는 사회교리로 본연의 사명에 매우 충실하게 되며, 이는 구원의 사회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 들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복음의 기쁨』, 178항.)  사회교리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계시된 바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회교리는 신앙과 영성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것으로서, 교회의 전통은 항상 사회교리의 요소를 포함하여 왔다.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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