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기 "오직 하느님만을"
상태바
판관기 "오직 하느님만을"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1.28 2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판관기

판관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약속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뽑으신 지도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요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들은 카리스마적인 인물들로 타고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판관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이 아닌 야훼를 선택하고자 할 때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내렸던 결정과 야훼께서 얼마나 충실하신지를 매번 상기시키고, 그들이 계속해서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판관기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양식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잊게 되고, 원수에게 횡포를 당하고, 그리하여 주님께 돌아가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잊어버리고, 핍박을 받고, 회개한 후 다시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양식은 제2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호수아 대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다음 세대는 야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들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의미한 바는 명백하다: 하느님께 손자 세대란 없다. 모든 세대가 새로이 변화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충실함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선택해야 하며, 그들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하느님은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고, 아버지가 가톨릭 신자인 것으로는 부족하다. 삶에서 당신이 섬길 하느님을 당신이 선택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당신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서로부터 아무 감흥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우리가 이 회개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성서에 나와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Battle of Gideon Against the Midianites - Nicolas Poussin

판관기의 제 6장은 기드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께 더 이상 충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신을 믿었다. 그러자 근방의 미디안족이 이스라엘의 땅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혔고 경작물을 파괴했으며 가축을 훔쳐갔다. 고통 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결국 그들의 불충실함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가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의 간청을 듣고 야훼께서는 젊은 농부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신다.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신약성서의 수태고지를 통해 너무나도 익숙한 인사말을 건넨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용감한 병사여!” 마리아가 그랫듯이 기드온 역시 당황한다. 그는 자기가 한낱 시골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기드온은 대답하길 “용서하십시오, 만약 야훼께서 저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에집트에서 행하셨다는 기적을 왜 우리에게는 베풀지 않으십니까?” (판관기 6,12-13).

정말 우리와 똑같지 않은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악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건가? 그 분이 진정 사랑의 하느님이신가? 그 분이 진정 능력의 하느님이실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을 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님은 거기에 계시고, 우리의 간청에 응답하기 위해 인내로이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은, 천사를 통해,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 할 힘을 너에게 주겠다. 너는 그들을 마치 한 사람을 해치우듯 쳐부수리라.” (판관기 6,14-16). 그리고 나서 성서작가는 천사가 정말 야훼로부터 왔음을 보여 주기 위해 기적을 행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기드온이 본 것은 무엇일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장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당신이나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주님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도록 부르신다. 거기에 대한 우리의 첫 충동은 의심이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 일을 성취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워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인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힘만으로 그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다음의 이야기가 그것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야훼께서 얼마 안 있어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리게 되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적과 싸울 수많은 군대를 모았다. 그러나 주님은 기드온에게, “내가 너를 위해 싸우기엔 군인의 수가 너무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를 아는 체도 않고 제 힘으로 승리했다고 으스댈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는 무서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이 군인들에게 알려라” (판관기 7,2-3). 그래서 기드온은 군인의 수를 삼분의 일로 줄였으나 여전히 만명이 남았다.

야훼께서 이를 보시고, “만 명이나 되다니! 군인이 너무 많다! 너는 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힘이 아닌 그 분의 힘으로 이길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으셔서, 다시 기드온에게, “군대를 우물가로 보내 물을 먹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시험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담갔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무기를 옆에 내려놓은 채,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주님은, “좋다, 무기를 내려놓은 병사들만 있으면 된다. 그들은 나를 충분히 믿었다. 이들이면 족하다.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리하여 기드온은 병사의 수를 삼백명으로 줄였는데, 그것은 다른 병사들은 무기를 단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주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들은 마치 우리들과 같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전쟁을 치루고 있으며, 그것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당신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주님의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한밤중이 조금 지나 기드온과 그의 병사들은 진지에 있는 수천명의 미디안군을 에워쌌다. 그들이 들고 간 무기는? 칼과 방패가 아닌 트럼펫과 횃불이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횃불을 쳐들고 트럼펫을 불면서 소리쳤다, “야훼와 기드온을 위하여!” 적군은 정신이 없어졌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싸우고 죽이며, 갈팡질팡 아우성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완전한 승리를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 (판관 7,1-22).

이 이야기가 다시 한번 주는 교훈은 유일신 사상이다: 당신 삶에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이 계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삶 속에 어떤 신을 모시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당신은 누가 당신을 구해 줄 거라고 믿고 있는가? 논리나 이성? 당신의 퇴직금? 국방부? 국가 안정 보장 기구? 한가할 때 당신은 어떤 상상을 하는가?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가? 어떤 일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누구건 어떤 것이건 그것이 바로 당신의 하느님이다. 그것이 당신이 머리 숙여 절하는 하느님이며, 당신의 삶의 주님인 것이다. 만약 당신의 주님이 야훼가 아니라면, 당신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커다란 승리를 맛본 후, 그들은 기드온을 찾아가 그에게 자신들의 주인이 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기드온은 거절했다: “그대들을 다스릴 사람은 나도 아니고, 내 자손들도 아닙니다.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야훼시오”(판관기 8,23). 그리하여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야훼를 기억하고 그 분을 섬겼다. 그러나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다른 신, 다른 우상, 다른 바알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삼손이 갖고 있던 힘의 원천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기드온에 이어 다른 판관들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어떤 때는 야훼께 충실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그들에게 왕은 따로 없었다. 삶의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통치체제의 측면에서 그들은 야훼만이 진정한 임금이시며 주인이시라는 신권주의적인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왕국, 하느님의 진리만이 다스리시는 왕국의 준비 단계이다.

 

Peter Paul Rubens Samson and Delilah

판관기의 13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잘 알려진, 영웅 삼손이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성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비현실적인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곤 한다. 이야기는 삼손의 괴력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고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가 사실이 아닐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되고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리를 놓치게 된다.

이야기의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대교적인 맥락에서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삼손의 어머니는 그를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주님의 일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표시로, 그는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이것을 수행자의 서원이라고 하고 오늘날에도 정통 유대교인들 중 양갈래로 딴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것은 나자렛 수도자들의 하느님께 대한 충성의 표현이다. 삼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음으로써 주님께 대한 봉헌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긴 머리는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뢰의 표시였다.

삼손이 하느님의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막강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맨손으로 사자를 죽였다. 그는 천명이나 되는 불레셋 병사들을 당나귀 턱뼈 하나로 무찔렀다 (그 당시에는 불레셋 족이 미디안 족에 이어 이스라엘의 적이었다).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마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 자신의 막강한 힘을 주님께 봉헌한 삼손 같은 인물이 생존했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그의 이야기가 되풀이되어 전해져 내려오면서 그의 힘은 엄청나게 과장되었고 그의 업적은 믿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구전되는 역사의 특징이다.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문제지 세세한 사항이 중요한 건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삼손의 힘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머리를 자르지 않는 하느님께 한 약속에 충실한 이상 그는 그 힘을 유지할 것이다.

데릴라가 등장한다. 우리는 “여자 반역자”라는 뜻의 이 이름을 통해 이야기의 전설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삼손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불레셋인들은 그녀에게 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려 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삼손에게 물었다; 그러나 삼손은 계속해서 그녀를 속이며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기하고 자신의 비밀을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그 힘의 원천은 주님께 대한 봉헌이었고, 그것은 자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으로 상징되었다.

데릴라는 삼손을 재우고 불레셋인들이 들어와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린다. 하느님 대신 반역자를 믿음으로써 힘을 잃게 된 삼손은 적들에 의해 쇠줄에 묶여 감옥에 던져졌고 때때로 끌어내어져 그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나고 그는 힘을 다시 얻게 되어 자신을 잡아넣은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원수의 궁전 기둥을 뽑아 버림으로써 그들을 무찌른다.

이 이야기의 큰 주제는 성서 전반을 통해 나타난다: 즉, 하느님께 완전히 승복하기,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먼저 헌신할 것, 자기 자신의 힘보다는 영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수아, 기드온, 삼손이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그것이 삼손이 갖고 있던 힘의 원천이었다.

성서 작가들이 감동적인 사건들과 전설을 혼합하여 농후하게 보존하고 확립시킨 이 주제들은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그들은 우리 삶의 비밀이 삶의 원천에 의해 우리에게 표출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쁜 소식이 인간 의식 속에서 서서히 작용하기 시작했으며, 받아들여졌다가 거부당하고, 사람들에게 믿기다가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우리가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