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도시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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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도시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1.2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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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3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
-아가 3,4

주님의 손을 잡고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께 말을 하자.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잡는다. 어떤 때 우리는 그분께 말하고, 어떤 때는 그분께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을 무릎을 꿇고 지낼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서로를 섬겨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을 위하여 기도를 봉헌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답고 경이롭게 우리는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들 때문에 바쁘고, 고용된 사람은 일로,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들로 분주할 때에, 그들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 우리의 시간을 내주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하여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일로 바쁘게 돌아갈 때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

 

사진출처=pixabay.com

기도는 단순하게 우리와 주님 사이에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기도는 그분과의 대화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말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이야기에 즐겨 귀를 기울이시고 특히 우리가 그분에게 귀 기울이는 침묵의 순간을 즐기신다. 우리들 대부분은 흘러가는 삶을 따라 기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내는 것에 익숙하다. 실상,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직접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그분의 문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제발 저를 들여보내주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중요한 분입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삶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듣고 또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시작한다.

그분께 귀를 기울여보자. 그분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붙잡고 다른 모든 것을 떨쳐버리자. 하느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싶다. 그분과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에 우리는 그분을 알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분의 뜻은 우리의 뜻이 되어간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가는 입구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하루 종일 우리는 하느님께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그리고 언제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 발견한다. 그분은 온갖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분은 친구를 원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그분은 그분 자신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을 말씀해 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와서 말한다, “도시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는 이 장소나 저 장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마음을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기도는 내면화의 문제이다. 광야의 체험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광야의 체험은 단칸방이나 외딴 집의 문제인가? 어떤 특정한 건물과 관계된 것인가? 광야의 체험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방문한다.

도시이든, 시골에서든, 기차 안에서든 차 안에서든 탄광에서든, 하루 종일 일하고, 청소하고, 강의하고, 말하든지 간에,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깨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기도는 하느님 앞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고요히 있을 것인가로 흥분된다면, 우리는 확실히 고요하게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내가 얼굴을 하느님께 돌릴 때, 나의 정신은, 나의 영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 고요히 머물러 성령을 기다린다.

예수 기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좋은 출발이다. 이 기도에서 다른 기도가 나올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그분께 가까이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에 매달리고, 항상 함께 지니며,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가르치자. 우리의 온 마음, 온 정신, 그리고 온 영혼으로 복음을 가르치자. 복음을 선포하자.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실제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류와 맺는 관계다. 어떤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하느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우리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될 때, 우리의 말과 삶은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준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장 깊이 갈망하는 것의 원천에로 우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기도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다이아몬드의 모든 각면은 하느님에 의하여 닦인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기도로 만드는 것이 충분하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온갖 작은 방식으로 가족들을 섬기는 것 – 이 모두가 기도다. 공부하는 것도, 만일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기도다. 아픈 것도 기도다. 건강한 것도 기도다. 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의 어떤 각면도 그리스도인 삶의 측면이 아닌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알아들을 수 없다. 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만, 하느님과 계속되는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수많은 다이아몬드의 각면을 닦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그분은 길을 열어놓는다. 길은 좁지만 지평선은 무한하다.

특히 기도에만 할당되는 시간들이 있다. 미사는 기도들 중의 기도이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가 구체적이 되는 하루의 순간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먹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마신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신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래서 그분과 우리 각자는 하나가 된다. 우리 영혼의 신랑은 또한 우리 신체의 신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실제로 미사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미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미사는 우리를 온전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옹한다. 어떤 심오한 의미에서, 우리는 미사가 된다.

미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매일 조우하는 것이다. 미사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두 미사 사이에 –오늘의 미사와 내일의 미사 사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스러운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성무일도도 좋다 – 시편과 성경의 구절들,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나 개인 방에서 기도할 수 있다. 광야 체험을 시도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다양한 기도는 모두 아름답고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기도들 중의 하나는 용서의 기도다. 양심 성찰은 모든 날의 최고의 순간이다. 우리는 하루를 돌아보며 가장 중요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본다. 그 중요한 관점은 바로 애덕, 자비다.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을 거부하거나 못되게 대했다면 사과가 필요하고, 다음날 확실하게 사과해야 한다. 죄는 죄이고,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발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사과한다. 잘못했다고 말하자. 매 순간은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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