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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희년, 별 관심 없나요?

[이은석 칼럼]

희년인지 아닌지?

제목이 좀 까칠하지요. 지금 우리는 한국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성구를 주제로 올 한 동안 희년의 기쁨을 나눠야 할 시기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희년은 한국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특별한 청원 과정을 거쳐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50년에 한 번,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 잘해야 두어 번 맞이하게 될 희년인데 그다지 알려지거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http://www.cbck.or.kr)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찾는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굿뉴스(http://www.catholic.or.kr)에서 희년 이야기는 없습니다. 교회 언론기관인 가톨릭신문, 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에서도 희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교회의 어른들은 희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16개 교구의 교구장님께서 발표하신 2018년 사목교서를 뒤져보니 평신도 희년을 언급하신 분은 딱 두 분, 대전교구 유흥식 주교님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님 뿐 입니다. 교회의 어른이든 교회를 대표하는 기관들이든, 교회 언론들도 관심이 없는데 뭐 일반 평신도들이야 뭔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처음 청원을 하고 행사를 준비하는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만 분주할 따름이겠지요.

어찌 되었든 희년은 희년입니다. 최근 희년이 잦은 것도 사실이지만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희년을 잘 준비하고 복되게 지내야겠습니다. 어떻게 이 희년을 보내는 것이 좋은지 한 번 생각해 보지요.

 

사진출처=pixabay.com

평신도로 출발한 교회

이번 희년에 ‘평신도’라는 말이 들어 있듯, 희년의 중심은 ‘평신도’인 듯 합니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대표 기구인지 아닌지는 따질 필요 없이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라는 직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희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국교회와 평신도는 뗄 수 없는 한 쌍의 수식어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라는 말은 한국 천주교회를 소개하는 첫 마디이자 우리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뭐 지금의 실상과 비교하자면 좀 쑥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백 수십 년 전 천진암 주어사에 모였던 일군의 학자들이 세상 이치에 대해 탐구하던 중 맞이하게 된 진리가 바로 천주학이었고,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학을 세상 이치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삶의 근거로 삼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누구도 진리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복음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천주를 믿었고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스스로 정한 기도시간을 지켰으며 주일공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유학을 근거로 삼고 있는 왕정국가 조선에서 교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면서 믿음의 선조들은 꾸준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조선을 지배하던 이념과 상반된 생각을 가진 천주교 집단의 등장은 기득권 세력에게는 참 난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질 집단을 없애려는 계책이 생겼을 것이고 박해는 당연한 수순이 일 것이고요. 살육을 동반한 박해는 아니었지만 믿음의 길을 막는 권력의 방해를 굳건히 이겨내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기에 한국 교회는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지금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생각했던 다른 길은 무엇일까?

평신도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 그리고 평신도 단체 창립 50주년, 이 두 가지 희년을 얽는다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줄거리가 됩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겉모습 보다는 그 속에 담긴 얘기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희년’이라는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요.

본질은 아마 믿음의 선조들이 추구했던 ‘다른 길’이 아닐까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고, 타고난 신분에 따라 체념하고 사는 것이 정도라고 믿었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혁명적 전환이 ‘다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이게 죽음도 두렵지 않은 신앙을 순교자들이 가지게 된 근원이 아니었을까요? 처세, 안위를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 신앙의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요?

2018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선조들이 직면했던 ‘다른 길’은 무엇일까요? 의도했든 아니든 ‘희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은총의 시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는 다른 어떤 길을 찾는 여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성당 건물에서 장엄하게 봉헌되는 미사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뿌려진 희생을 기억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아픔을 함께 느끼는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작은 행동을 시작하는 것도 ‘다른 길’을 걷는 첫 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희년’의 기쁨은 해방이고, 회복이며, 나눔입니다. 과거의 영광, 현세의 안위를 버리고 사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누더기를 걸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 그 길이 ‘평신도 희년’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아닐까요?

이은석 베드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사무국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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