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비폭력으로 새 나라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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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비폭력으로 새 나라를 열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1.2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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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1]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한 땅으로 인도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재다짐한다;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분의 현존을 믿는 것 뿐이었다 (여호수아 1,9).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일이 시작된다 

그 다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아주 평범했다. 여호수아는 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원을 보낸다. 그 사이에 진지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마지막 도강을 위해 준비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려는 장대한 시점에 서서, 우리는 전혀 특별한 일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아주 평범해 보인다. 아주 자주 우리는 유달리 특별하지 않았던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 보고서야 그 안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었음을 깨닫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마 그다지 영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사건들을 실제로 겪었을 것이고 나중에 가서야, 그것을 되돌아 보며, 그 안에 숨겨진 영성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예로, 성서의 이 부분에 나타나는 일련의 평범한 사건들로부터 발견되는 영성적인 주제 중 하나는 일신론이다. 진정한 의미의 일신론은 “저 높은 하늘에” 수많은 신들이 아니라 단 한 분의 하느님만 계시다는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유일 신앙은 공허한 약속만을 남발하는 거짓 신들이 아닌 우리 삶 안으로 “내려와 여기 계시며” 진정한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실질적인 신뢰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분 하느님을 굳게 믿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야훼께서 그들을 진정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해 주님을 믿는 대신 언제나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구원해 주지 못하는 덜 신적인 존재에 달려가기 보다는 살아계시며 유일하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맡기는 것이 참다운 유일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역시 그러한 신앙의 형태가 우리 삶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든 행동이 지극히 평범했음에도 그 안에서 주님께서 활동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 3월12일,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영국의 소금세 신설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행진에 나섰다. 인도인의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영국산 소금 40㎏당 1루피씩 세금을 부과하자 직접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통 염전을 향해 떠났다. 식민지 수탈에 온 몸으로 맞선 것이다. 간디는 바닷가를 향해 걸어 가면서 거쳐가는 마을에서 연설을 하고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야외에서 잠을 자고 최소한의 음식만을 취하면서 행진했다. 인도인들은 영국경찰들이 내리치는 곤봉에 맞아 쓰러져 가면서도 해안가에 도달했다.간디가 영국의 소금법을 위반하며 소금 한 주먹을 집어 들자 영국군 지휘관 하나가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어느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백미로 꼽히는 소금행진의 정점이다. 인도인들이 조성한 소금 밭은 영국 군경의 군화 발에 뭉개졌다. 61세의 간디와 그의 아들이 감옥에 갇혔어도 인도인들의 정신은 짓밟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인도의 해안에서는 소금을 다시 생산했으며 소금법 위반으로 6만 명의 인도인이 투옥되었다.영국에 대한 복종 대신 갈수록 저항운동의 불길이 번지자 영국은 1931년 ‘자가 수요를 위한 소금은 생산을 허용한다’는 명분 아래 소금세 신설을 백지화했다. 인도의 저항운동과 국산품 애용 캠페인(스와데시)도 뿌리를 내렸다. 인도 독립의 기반이 놓여진 셈이다.

거룩한 신뢰의 상태로 들어가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너 막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일을 지시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해지라고 권고한다: “내일 아침까지 모두들 목욕재계하여라. 야훼께서 내일 아침 너희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다.” (여호수아 3,5).

여기의 주제는 희생으로, 라틴어의 sacrum facere에서 유래했으며, 그 뜻은 “거룩하게 만든다”이다. 희생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고통의 개념과는 사실 연관이 적다. 성서적 차원에서의 희생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포기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거룩한 신뢰의 상태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담배를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살면서 어느 한 순간 스스로에게, “이런 인위적인 자극이 왜 필요한거지?”라고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주님께 의탁하며 그 분께서 당신에게 진정한 자극을, 진정한 삶의 활력소를 제공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지금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느님이 주시리라고 신뢰하면서 그 징표로 당신은 담배를 끊는다. 이제까지 당신이 힘을 얻기 위해 의지했던 어떤 것-거짓 신-을 포기함으로써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 있는 힘과 만날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희생이란,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의 수단이 된다. 여호수아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오늘 그들 자신을 주님으로 채우고 내일 기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한 것이다.

하느님 힘으로 오르단 강을 건너다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은 그들이 홍해를 건넜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요르단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흘러내리던 물이 솟아올라 사람들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여호수아 3,13-17). 여호수아서의 작가는 여기에서 출애굽의 저자가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문학적 기교를 사용한다:

작가는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적 이야기를 첨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건넜다는 것을 전한다. 돌이켜보면, 탈출한 노예 집단이 가나안을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고 - 결국 성공했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들이 명백한 폭동 없이 정복에 성공한 일은 수수께끼 같기만 하다. 그들은 그 지역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모든 생존자들을 죽였으며, 도시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의 행동은 피정복자를 고문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며, 아이들을 노예로 삼고 재산을 약탈하는 원시적인 도덕성에 비하면 어느 정도 진보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을로 들어가 그 곳을 “탐하지 말 것을”, 다시 말해, 그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의 몫으로 남겨둘 것을 명령받는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로 찾아오시며 한번에 한 걸음씩 그들을 앞으로 불러내신다는 것이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나 비폭력의 원칙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 분은 대신 강간, 약탈과 노예로 삼는 것을 하지말고 그것을 모두 당신께 바치게 하셨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도덕성은 아주 천천히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 역시 믿음에 있어 그와 똑같이 점진적으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도 우리는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새로이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분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에만 계실 뿐, 다른 어떤 교회에도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개신교도를 미워해도 괜찮았다; 사실, 그들은 이단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주님은 우리를 그러한 원시적인 믿음의 상태에서 끌어 올려 주셨다. 그 분은 우리를 초창기의 편협함에서 이끌어 내시어 다른 그리스도인도 주님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임을 알게 해 주셨다. 주님은 오늘날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무조건적인가를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신다. 여호수아서는 그 분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가는 과정, 느리고 가끔씩 고통스럽고, 점진적인 성장 단계 중 초기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악을 이기는 새로운 방법

이 책의 6장에서는 예리고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이 이야기가 사건 발생 훨씬 뒤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원본은 분명히 문학적으로 상당히 많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현대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예리고 성벽은 여호수아가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 작가는 이 무너진 성벽이라는 사건을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신뢰를 담은 이야기로 창조한 것이다.

야훼께서는 예리고 성과 그 왕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정작 일러 주신 전쟁 계획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침묵 속에 계약의 궤를 들고 그 도시 성곽 주위를 엿새동안 행진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칠일째 되는 날, 침묵 속에서 돌다가, 트럼펫 소리를 듣는 즉시 고함을 치라고 명하셨다. 트럼펫 소리에 사람들은 고함을 질렀고, 예상대로 성벽은 무너져 내렸다.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현실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야기의 요점은: 전투를 하는데에도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악을 이기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그들에게 일러 주셨다. 퀘이커 교도들은 오래 전에 성서에서 이 방법을 발견한 후 묵시록에 나타난 이미지를 이용해 이것을 '양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쟁에 나가시게 하는 것, 주님께서 싸움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와서야 비폭력과 평화조성이라는 필연적 신학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님을 바랄 뿐이다.

이 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한 글이 역대기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제 20장에서 예언자는 적들의 강력한 군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에게 적을 이기려면 주님이 세우신 전쟁 계획을 따르라고 말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언자는 궁사와 창을 든 사람을 최전선에 배치하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가수들을 맨 앞줄에 세우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군대는 주님을 찬양하는 이들을 선두로 하여 전투장으로 들어갔다. 적군들은 혼란에 빠졌고 이스라엘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했다. 진정한 영성은 매우 창의적인 것이다.

비폭력, 사랑의 힘, 진리의 힘

이 모든 것은 정말 비현실적이며 순진하게 들리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예리고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하고 싶은가? 우리는 거대한 벽에 부닥치고, 폭풍이 그것을 없애버리길 바란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 장애물을 보면서 상식적으로 우리 온 힘을 다해 그것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대신 다른 새로운 방법을 써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비폭력, 사랑의 힘, 진리의 힘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번슈타인의 <미사>라는 곡 중 주님의 말씀에 관한 노래가 있다. 음악은 조용하게 시작되나, 점점 강해진다. 주님의 말씀은 갇혀 있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다고 음악은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노래처럼, 주님의 말씀은 성장하고 전진하며 승리한다.

주님의 말씀은 처음 들은 당시에는 믿기가 어렵지만 진실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힘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힘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작용해, 인간의 역사 안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화시킨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가히 인상적이다. 하느님께서는 수 천년 동안의 히브리 역사와 그리스도교 역사를 기다리며 당신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셨다. 그 결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으나, 신앙을 통해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으며, 조금씩 조금씩, 승리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능력을 드러내고, 승리할 것이다. 우리 삶 속의 예리고를 극복하게 할 것이며, 세상의 군대 역시 무찌를 것이다.

 

새로운 땅에서, 야훼만을 섬겨라

여호수아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가나안군을 차례 차례 무찌르시어 마침내 이스라엘의 12 부족이 가나안 땅을 나눠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날 즈음, 여호수아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에서,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다. 그는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 -끊임없이- 그들의 소명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계명에 충실해서 특별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들만이 주님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과 혼인을 해서는 안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좌우를 둘러보지 말고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만 똑바로 따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거나 신뢰하지 말고 야훼만을 섬겨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소명에 따라 살면,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들을 약속한 땅으로 이끈 그 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지탱 시켜 줄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충실하실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 분께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에 늘 진실하실 것이다; 그들 역시 그 말씀에 진실하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늘 지키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만을 충실히 지키면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느님이 그들을 위해 해 주신 모든 것,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시작으로, 이사악과 야곱을 선택하시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신 것을 상기 시켰다. 야훼는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부터 구해 주셨고, 사막에 있는 그들을 발견하셨고, 그들을 약속한 땅으로 데려오셨다. 그 분은 그들이 세우지 않은 도시를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밭을, 그들이 가꾸지 않은 포도밭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모두 선물이었다. 모두가 은총이었다.

이제 그들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은 야훼를 기억하고 지낼 것인지 아니면 그 분을 잊을 것인가? 그들은 결정해야 한다: 주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가? 그들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노력만을 믿을 것인가? 그들은 그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역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우리 역시 이스라엘인들과 똑같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신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분의 능력과 우리 능력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분의 나라와 세상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다. 하느님이 전부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다. 실제로 종교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이라 부르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놀음이 되어 버렸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명목으로 어렴풋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종교적인 형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분의 구원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일단 그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당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느끼게 되면, 그 분의 사랑을 당신의 가슴으로 느끼게 되면, 당신은 여호수아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 말씀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약속을 듣고 그것이 지켜지는 것을 보게 되면, 당신은 절대적인 충실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들은 어쨌든 성사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귀결된다.

하느님은 충실하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때로는 놀랍고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으며 그러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내 삶 속에서도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얼마나 충실하신지를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께 청한 것 모두를 이미 나에게 주셨다. 내가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그 분께 청한 것 모두를 이미 받았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 유년 시절의 간절한 소망들은 넘치도록 채워졌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을 당시 그 경험을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충실하신지를 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꿈꿔 오던 모든 것을 주셨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결정을 하라고 했을 때, 주님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충실하신 것 같이 주님께 충실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말을 들은 후에야 여호수아는 평화롭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안다. 절대로 간단할 수 없는 문제다. 성서의 다음 이야기인 판관기가 왜 그런지를 보여 준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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