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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긍정

[이진권 칼럼] 

매년 1월 첫째 주에 2박 3일 피정을 합니다. 올 해로 다섯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1년 만에 만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함께 고요함속에서 기도하고, 성찰하며 삶을 나눕니다. 새로운 시간속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가 무엇인지를 홀로 그리고 함께 분별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그리 시끄럽고 요란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연륜이 쌓여가다 보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들의 아름다운 만남이 되리라는 믿음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피정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오후 한 나절을 사람이 드문 산길을 오롯하게 산책하는 때입니다. 올 해 산책길은 작년과는 다르게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걷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으며 올해의 여정은 어떠할지 생각도 해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기도 했습니다.

그 산책길에서 제일 몸과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따사로운 햇살이 언제나 나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로는 등 뒤에서, 때로는 정면에서 겨울 오후의 햇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굽을 길로 들어서면 어떤 때는 산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이내 그 길을 돌아서면 반갑게 다시 햇살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올 한 해는 이렇게 늘 나와 함께 하는 은총의 햇살을 깨어서 알아차리고, 잘 누리며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은 고단하고 기나 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너무도 많고도 복잡한 직접적, 구조적 폭력에 관심을 갖고 맞서다 보면 어느 새 생명과 평화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가고 지쳐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이 메마른 사막이 되고, 폭력의 유혹에 굴복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찾아 나섰던 평화의 길은 사라지고, 길을 잃고 헤메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 신부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구조적 죄악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 를 외치며 저항하는 만큼, 생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예’ 라고 긍정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생명을 긍정하고, 생명의 에너지가 재충전되어지는 만큼만, 평화에 대한 투신과 폭력에 대한 저항도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일수록, 정기적으로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고 우정을 나누기, 어린아이와 함께 놀기, 침묵과 고독 속에 머물기, 자연을 거닐기 등을 실천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새해가 시작된지 얼마 안됐지만, 벌써부터 여러 가지 일로 바빠지고 몸과 마음이 살짝 피곤해 질 때가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헨리 나웬의 ‘생명에 대한 긍정’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원인 가까운 숲에도 들어가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방문해서 그냥 수다떨고 잘 듣고, 맛있는 소박한 밥상을 즐기고 싶습니다. 한 달에 1번 쯤은 나만의 고요하고 고독한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한 실험도 해 보아야겠습니다.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늘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을 받으며, 지치지 않고 즐겁고 생기발랄하게 진행되어가는 한 해의 여정이 되기를 마음 모읍니다.

이진권 목사
평화영성 교육센터 ‘품’ 대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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