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함이 부끄러운 부유한 이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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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함이 부끄러운 부유한 이의 유서
  • 유대칠
  • 승인 2018.01.22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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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2]

천국을 믿는 이라면 천국을 가고 싶어 한다. 굳이 지옥을 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알려지기 전, 유럽인에게 세계는 죽음 이전과 이후였다. 죽으면 또 다른 존재 방식으로 지금과 유사한 삶을 이어간다 생각했다. 그러니 죽을 때, 이런 저런 평소 좋아하는 것을 함께 묻었다. 죽음 이후 그 세상에서도 계속 사용하란 뜻에서 말이다.

그리스도교가 알려지면서 죽음 이후의 세상을 다르게 받아드렸다. 죽음 이후 세상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된다. 죽음 이후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두루 받아들여졌다. 누구나 천국을 가고 싶어 한다. 천국을 믿으며, 굳이 지옥을 가려 하지 않는다. 천국을 가고 싶어 한다. 당연한 일이다. 상식적인 일이다. 처벌보다는 상을 받으려는 것이 인간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죽음 이후 삶은 불안으로 다가오고

아무리 성사를 통해 용서 받는다 해도 죽음 이후 삶은 불안으로 다가온다. 미처 고백하지 못한 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은 수많은 순간 저지른 또 다른 수많은 죄들이 불안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탁월한 신학의 합리성으로 설득한다 해도, 그 설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죽음이 무섭다는 것, 이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너무나 상식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서유럽의 중세를 살아간 이들 역시 천국에 가고 싶고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어떻게 천국에 갈지 고민했다. 특히 경제적 성공을 이룬 부유한 이들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더욱 더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그들은 알았다. 경제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 많은 이들이 힘들게 고통스러워했음을 말이다. 그 힘든 노동자, 가난한 노동자의 눈물과 고통을 거름으로 이룬 성공이 천국으로도 이어질까? 타인의 불행으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의 행복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까? 부유한 이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해야 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 자신의 삶이 자신을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스스로 말이다. 그 부끄러운 마음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성당에 무엇인가 큰 것을 기증한다면 천국이 허락될까? 하느님은 천국 입주권을 팔지 않을까? 차라리 천국 앞에 매표소라도 두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천국에 갈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그 고민의 답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인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천국으로 이끈다 생각했다. 나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남들의 평가다. 결국 천국을 가기 위해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유서 가득히, 가난한 이를 위해 기부를 

아주 낮은 임금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 부모가 모두 떠나고 남겨진 아이들... 이들 앞에서 부유한 이는 착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보게 된다. 유서를 통하여 자신의 결단을 공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법률가가 증인이 되어 보는 가운데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유서가 작성되었다.

그 유서 가득히 가난한 이를 위한 기부와 봉사를 담는다. 물론 가난한 성당과 수도원을 위한 기부도 있지만 대체로 가난한 이를 위한 기부를 절대 잊지 않았다. 그들의 유산으로 병원이 세워지고 홀로 살기 힘든 노인을 위한 공간이 세워졌다. 심지어 이러한 기부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막상 자신은 자신이 기증한 요양원에서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내어준 공유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소유물로 창조되지 않았다. 13세기 부유한 이들은 유서를 통하여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고 소유한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행위를 했다. 이 통하여 천국을 향하는 자신의 욕심도 채울 수 있었다. 천국은 착한 이가 가는 곳이니 말이다.

13세기는 그랬다. 많은 수도자들이 가난을 이야기했다. 성 프란치스코도 오캄도 모두 그렇다. 가난을 두고 깊은 사유가 이루어진 시기, 바로 그 시기는 소유라는 욕심으로 사회가 힘들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더 많은 소유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기 말이다. 그 소유의 욕심으로 누군가 고통스러워해도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러한 시기 말이다. 죽음의 앞에서 이런 이기적인 행복이 과연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을지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했다.

그 불안은 착한 이가 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나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말이다. 남을 아프게 한 이가 천국에 갈 순 없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부유함이 부끄러웠다. 거대한 집과 많은 소유물은 지옥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지름길로 보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이 그 가운데 있을지 생각하면 아름다움과 웅장함보다는 힘든 이들의 눈물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 불안에 크면 클수록 유서는 담긴 가난한 이를 향한 기부는 커져갔다.

요즘 크고 높은 성당을 본다.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생각해야 할 교회가 가난한 이의 아픔에 등을 돌리고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귀가 의심스럽다. 그렇게 이웃과 함께 하지 못하면서 매주 미사와 기도문으로 13세기 부유한 이들이 느낀 불안감을 해결한 것일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교회의 몇몇 모습을 보면 불안이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착하고자 한 13세기 부유한 이들의 그 애씀과 부끄러워할 줄 아는 모습이 그립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이들이 과연 천국을 논할 수 있을까. 나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왠지 조금 서글프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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