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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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신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
  • 김유정 신부
  • 승인 2018.01.17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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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2

"만약 여러분들이 인간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그를 구름 속에서 보며 무기력한 죽은 물질로 된 신상들이나 당신들의 두뇌가 만들어 낸 공상적 이야기들에서 볼 수 있겠는가? 나는 당신들이 남녀 인간들에서 하느님을 보기 시작하는 날 당신들을 종교적이라 부를 것이며, 당신들은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내어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것이다.… 누가 하느님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그는 찾아야만 한다고 말하는가? 하느님은 영원부터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는 영원부터 그 안에 살아왔다. 그는 영원히 알려져 있고 영원토록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길희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민음사, 1994, 229. 재인용) 

힌두교 신학자인 비베카난다가 1896년 런던에서 ‘실천적 베단타’ 강연 중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이다. 하늘이나 성상(聖像) 등은 신성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질타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다른 방법

우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도와야하지만,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기에 은혜를 베풀어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섬기는 일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현존하시지만, 그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시지 않는다. 마태 25,31-46에 등장하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이나 ‘저주받은 자들’ 모두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다. 톨스토이가 전하는 러시아 민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톨스토이 민화집, 삼중당, 1977)도 이 본문을 모티프로 하여 같은 고백을 한다.

구두장이 마르틴은 꿈에서 자신을 방문하겠다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예수를 기다리지만 뵙지 못하였다. 다만 길에서 눈을 쓸던 노인에게, 추위에 떠는 여인과 아기에게, 그리고 배고픈 아이와 가난한 할머니에게 선행을 베풀며 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날 밤 예수께서는 마르틴이 하루 종일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차례로 등장하며 ‘그것도 나였다.’고 말씀하신다.

<넷째 왕의 전설>이나 권정생의 단편 <오두막 할머니>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지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섬기려 했던 이들은 자신에게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내가 그였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종교적 회심이 일반적으로 ‘돌아봄’ 가운데(in retrospect)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성찰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였거나 외면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 대신 몸값을 치르시는 분 

예수께서는 왜 당신 자신을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시는가? 구약성경의 ‘고엘(גֹּאֵל)’이라는 개념이 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고엘'은 본래 가족의 권리를 유지하거나 그 연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개입하는 가까운 친족을 의미했다. 고엘의 역할은 친족이 살해되었을 때 대신 복수를 해 주고(민수 35,16-28; 신명 19,6-12; 2사무 14,7.11), 빚 때문에 팔려간 친족이 있으면 돈을 주고 속량해 주며(레위 25,48-49), 가난한 친족이 소유지를 판 경우 그것을 되사는 것(레위 25,25-28; 예레 32,6-11) 등 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탈출 6,6)이나 예언자(이사 43,1), 고통 받는 사람(시편 69,19; 103,4)에게 고엘의 역할을 하신다고 고백하며, 이 때 고엘은 주로 ‘구원자’로 번역된다. 욥은 고난 가운데에서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 19,25)이라고 외친다. 이러한 고엘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사 ‘가알’은 ‘몸값을 주고 노예나 포로를 구해내다’라는 의미의 ‘파다(פָּדָה)’와 함께 ‘구속(救贖)’이라는 개념의 형성에 기여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해방자요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역할은 구약의 여러 개념들을 종합하여 이해해야 하지만, 예수께서 “많은 이들의 몸값(λύτρον)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는 표현 등은 ‘가알’과 ‘파다’의 개념과 연관성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의 고엘

예수께서는 식사 초대를 할 때에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베푼 것은 누군가 대신 갚아주시는데 그는 바로 그들의 고엘(구원자)이다. 예수께서는 보답할 능력이 전혀 없는 마태 25,41-46의 ‘작은 이들’의 고엘이 당신 자신이라고 선언하실 뿐 아니라 -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그 ‘작은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누가 저주받은 자들인가?

그렇다면, 마태 25,41-46에서 ‘염소들’로 분류된 이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 불리며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들어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까? 본래 고엘은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억압받는 이에게 고엘은 구원자이지만, 억압하는 자에게 고엘은 자신이 억압한 이의 복수를 대신 하는 부정적 존재이다.

마태 25,41-46이 전하는 또 다른 충격은, 저주의 언사가 억압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주받은 이들의 잘못은 다만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켰다는 점이다. 본문은 그들의 중립이 억압하는 자의 편에 선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듯하다.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들은 결국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해 마련된 최후를 맞게 된다. 2014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했던 말은 마태 25,31-46의 맥락에서 더욱 선명하게 이해된다.

"나는 (유족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것(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달고 반나절쯤 뒤에 어떤 이가 다가와 '떼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비극적 사건에 중립적이어야만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한겨레신문, 2014.8.19)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켜서는 안 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도 고통 받고 계신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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