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찬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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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찬 기억들
  • 케이트 헤네시
  • 승인 2016.05.09 15: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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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3년 미국 올비스 출판사에서 발간된, 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그를 알았던 사람들이 그린 초상화>를 '참사람되어'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이 서문은 도로시 데이의 손녀 케이트 헤네시가 지은 글입니다. -편집자 주 

 

어머니와 나는 도로시 데이라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분에 대하여 고심하면서 수많은 긴 겨울밤들을 보내곤 했다. 도로시 데이를 알게 된다는 것은 사는 동안 내내 무엇이 중요한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집을 주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자신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그분은 나에게 두 사람의 모습으로 있다. 한 분은 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한 할머니로, 또 다른 분은 공인의 모습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그분은 아프리카와 러시아로부터 선물과 엽서를 보내주는 매력적인 할머니였다.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이 마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책과 자료 따위로 가득찬 그분의 방도 그랬다.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만지기가 두려웠다. 할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신비 그 자체인 그분의 삶을 내가 아무 생각없이 엉망으로 해 놓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분의 가방도 평범하고 낡았지만, 역시 마술 상자였다.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편지로 가득했다. 우루과이의 사제들, 캘리포니아의 농민들, 미네소타의 주민 등등. 또 거기에는 공책과 펜이라는 순수한 마술 도구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보석은 할머니가 작가라는 사실이라고 여겼다.

할머니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난 주저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안기거나 키스를 한 적이 없었으나, 그분은 매우 열정적인 분이었다. 도스토예브스키와 탐정소설들, 이태리 오페라와 러시아 이콘들, 신앙과 일에 대해 에너지가 넘쳤다. 나는 그 어떤 할머니 같은 말들보다 그분의 열정이 내 영혼을 흔들었고 한 소녀의 정신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나는 열다섯 살 때쯤 받은 엽서를 찾아냈다. 할머니는 그 엽서에서 “얘야, 너는 나한테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더구나.” 라고 썼다. 난 기분이 상했다. 이게 사실이었나? 할머니한테 편지 쓰는 것이 창피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도로시 데이한테는 아이들이 보통 하는 것처럼 재잘거리는 편지를 쓸 수 없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할머니가 어떤 분이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정말로 잘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가난하게 자라면서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나의 편협하고 왜곡된 눈으로 그분의 삶을 깊히 성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첫 번째로, 글쓰는 일이 매우 존경할 만한 일이고 더 나아가 강력한 영향을 주는 행위라고 믿도록 내가 키워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할머니의 생동감 있게 활동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은, 성장해가는 소녀에겐 좀 이른 주제였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일꾼이라는 탁월한 혼돈도 있었다.

분명히, 할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들-사랑, 감탄, 난처함, 영감 그리고 은근한 곤혹스러움 등–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때때로 그분이 나에게 준 영향이 얼마나 큰지 혹은 아주 작은지 전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도 할머니의 발자취를 따를 겁니까?” 마치 내가 사람들보다 더 자격이 있거나 책임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질문이다. 아, 도로시 데이의 견고한 발자국으로 새겨진 그 독특한 춤을. 그분의 삶은 따르기는커녕 이해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의 고유한 신앙이나 비전 없이 또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비전을 따를 수 없으며, 그러면 행동들도 의심스럽고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분의 힘과 존재는 복잡한 삶이었지만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그분이 살아계셔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사후에도, 생전에 사셨던 것처럼 복잡한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난 그분과 관련된 그런 변화들을 말끔히 정돈하고 싶은 내 성향을 억제해야 한다. 그분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정리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다.

할머니에 대해 말하거나 쓸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분의 삶에 관한 대략적인 파악, 짧은 일견들, 기억되는 말들, 충고들, 교훈 같은 것들에 의지한다. 그분은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도로시 데이 상을 갖고 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의 희망이나 느낌 혹은 개인적인 경험 따위에 의해 그분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보는 것이다. 우리들은 매우 자주 극단에 치우쳐서 그분이 성인이거나 아니면 깊은 결점, 흉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피상적인 분류에 쉽게 빠져버리는 우리자신들의 모습은 잘 돌아보지 못한다.

할머니의 소명은 강력한 부르심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강력한 반응들,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양 측면의 반응들을 가져온다. 어머니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이 모든 것은 다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도로시 데이의 삶에 충격을 받고 나서 즉각적으로 할머니의 사생활로 후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로시 데이가 가졌던 신앙과 비전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것들을 결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은 어떤 깊은 심연처럼 생각하면서 재빨리 호의라는 모양새를 입는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의 역할이 도로시 데이의 삶이 지닌 전체적인 가치관을 진단하는 잣대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아, 도로시 데이는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렇게 판단하면서 그들은 나의 할머니가 했던 모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버린다.

또 다른 한편, 그분을 그냥 성인으로 취급해버리려는 성향들도 있다. 이런 모습도 완전한 무시만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분의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완전히 우리들의 뇌리에서 치워버릴 수 있을까?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의 궤도를 벗어난 곳에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그냥 놔둔다? 나는 성인과 성인되는 조건에 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확실히 나는 성인들에 관한 복잡함을 아는 바가 없으나, 우리들이 성인들을 이용하여 도로시 데이의 복잡함을 세련되게 그리고 단호하게 제거해 버리며, 그 와중에 우리자신들은 궁지에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를 성인으로 간주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영감을 일으키는 좀 더 나은 원천이 될 것인가? 더 쉽게 기도를 청할 수 있는가? 그의 평생의 행적이 더 유효해질 것인가? 그분이 성인품에 오르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도로시 데이는 묵살해버리기도 어렵고 선호하는 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그리고 찬양하기엔 위험스러운 여성이다. 찬양 혹은 감탄이라는 것은 아마도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행위인 것 같다. 찬양 혹은 숭배를 논하는 것은, 편안할 만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도로시 데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지나친 칭찬은 당신이 무언가 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확실히 할머니의 삶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있다.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에 관한 책, 영화 그리고 연극을 만들자는 많은 제안을 받았으나, 우리는 할머니가 발산하는 것과 똑같은 영감으로 그분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다. 할머니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의 영웅이며 극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웅적인 행동을 한 분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냥 뒷전으로 물러서서 가난한 이들의 삶과 신앙에 관한 느낌에 관해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진부한 관점들, 단지 편안하고 전통적인 신앙과 개인적인 강령을 지지하는 데에 그치는 그런 관점들에 의존하여 할머니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가난한 삶을 역동적인 것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단순한 순간들로 변화시켰다. 그 분이 가난에 그런 엄청난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면, 거시적인 것에 항상 시선을 두면서도 사랑스러운 것, 작고 섬세한 것들을 인정하는 그런 세계관과 풍요로운 신앙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분의 삶을 묘사하면서 그와 똑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이란 부서지기 쉽고, 예측할 수 없으며 심각한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더듬는데 있어 기억들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여겨진다면 위험한 일이다. 기억들은 전체성과 불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그분의 저술들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그러나 정직한 모든 작가들이 인정하듯이, 저술이란 조심스럽게 구성된 생각들과 재구성된 전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단편이고, 조각들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은 분명코 자체의 생명을 갖고 계속된다. 그리고 바로 일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비전과 신앙을 발견하는 것이 할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길이 될 것이고 그 이상의 다른 길은 없다.

어머니와 내가 곰곰이 생각한다고 하여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지만, 할머니가 나에게 풍부한 사랑과 용기를 준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분은 끊임없이 또한 한결같이 나에게 자극을 주었는데, 그 자극은 거의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지만 나의 작은 등 뒤에 착 달라붙어있어 결코 느슨해지는 법이 없는 부추김이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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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가입이 쉽게 되어서 기쁩니 2016-09-16 1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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