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적적’ 탄생 이야기,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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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적’ 탄생 이야기, 믿어야 하나?
  • 한상봉
  • 승인 2018.01.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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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크리스마스-2

예수 탄생 이야기의 ‘사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신앙이 없다’는 뜻인가? 만일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았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가? 사실성 여부를 묻는 이런 믿음에는 ‘원죄’를 이해하는 방식이 연루되어 있다.

교회의 교부들은 그동안 원죄가 ‘성관계’를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염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마리아가 예수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했다면, 예수는 원죄를 물려 받았을 것이고, 결국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흠없는 희생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대속신앙이 무너지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 교리는 예수 죽음의 구원사적 의미를 지탱하기 위해 포기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그러나 실상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려주는 체제전복적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사실(fact)은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었고, 그의 부모는 마리아와 요셉이었고, 고향이 갈릴래아 나자렛이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복음적 진술은 그들이 경험한 예수에 대한 의미의 전주곡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를 통해 이렇게 묻고 답한다.

“누가 유대인의 왕인가?”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는 헤로데의 칭호였다. 헤로데는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속박, 폭력, 잔인함의 대명사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며, 그래서 헤로데가 예수를 죽이려 했다.

“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며, 구세주이며,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온 분인가?”
-이 모든 칭호는 본래 황제 카이사르의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칭호를 나자렛 예수에게 돌림으로써, 황제가 하느님의 뜻을 구현한 인물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누가 세상의 빛인가?”
-제국신학에서는, 빛과 이성과 제국의 신 아폴로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상의 빛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이 처형한 예수가 어둠 속의 빛이며, 세상의 슬기로운 현자(동방박사)들이 참된 빛을 찾아 예수를 경배했다.

 

An Ethiopian Icon

마태오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에서 예수는 ‘새로운 모세’였다. 악한 통치자(마태오복음 1-2장의 헤로데와 탈출기 1-2장의 파라오)가 새로 태어난 유대인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려 함으로써, 미리 예정된 아기(모세와 예수)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개입과 보호하심으로 목숨을 건진다.

예수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것처럼, 산에서 설교를 하며 새 계명을 준다.(마태 5-6장, 산상설교)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루카복음서의 탄생 이야기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다. 루카복음은 여자들과 변두리 인생들에게 친밀한 복음서이다. 마태오 복음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요셉에게만 사용하지만,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부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모두에게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1,6)고 전한다.

루카복음에서 여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요한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도 엘리사벳이었고, 즈카르야는 단지 확인만 해준다. 성전에 갔을 때에도 시메온과 거룩한 여자 예언자 한나도 있었다. 루카복음에는 유난히 여자들이 많이 등장해 예수에게 말을 걸고 치유를 받는다. 예수를 따라 다녔던 여자들의 이름이 모두 나오는 것도 루카복음서뿐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8,1-3)

한편 마태오복음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은 ‘박사들’(Magi)이었으나, 루카복음에서는 ‘목자들’이다. 목자들은 사회계급으로 봐서 농부들보다 낮으며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1,52-53)에 속한다. 또한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루카복음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자들의 의무를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하고 가르치며,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6,20)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6,24)이라고 말한다. 바리사이의 집에서 예수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14,13) 하고 충고한다.

세관장 자캐오 이야기는 루카복음에만 나오는데, 예수를 만나고 자캐오는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

 

참고__

<첫번째 크리스마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하느님과 제국>, 존 도미니크 크로산, 포이에마, 2010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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