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과 창조주가 놀랍게도 하나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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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과 창조주가 놀랍게도 하나가 되고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8.01.1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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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이르러 프란치스코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스코투스의 작품들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합쳐져 자연의 주제가 처음에는 바깥에서 나중에는 프란치스코회 내부에서 부활하였다.

19세기 초기에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인 요셉 괴레스는 프란치스코를 서정적 음유시인으로, 자연의 찬미자이며 창조의 시인으로 묘사한 책을 발행했다. 1852년 프랑스에서는 빈센트 아 바오로회 창시자인 프레드릭 오자남이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에서 선집한 내용과 프란치스코회 작가들의 시에 관하여 쓰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낭만주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가치관들의 가톨릭 표상으로서 자연을 사랑하는 성인인 프란치스코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연에 관한 커져가는 관심과 과학적 탐구를 스코투스의 저술과 대화하도록 이끌고, 마침내는 프란치스코회 전통을 다시 재 인식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영국시인의 기여였다.

옥스포드에서의 해후

1872년 8월 3일, 한 무리의 예수회 학자들이 휴일을 보내려고 맨 섬에 도착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번에 나는 배들리 도서관에서 스코투스의 글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이는 새로운 섬광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건 아마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자비일 것이다."

그날의 일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 이후 하늘이나 바다의 본질에 몰두할 때면 나는 스코투스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일기를 쓴 예수회 회원은 제라드 맨리 홉킨스였다(1889년 사망). 영국성공회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홉킨스는 옥스포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곧 바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세기 후반 가톨릭신학, 스콜라철학(신학)을 그대로 배우고 당대의 강력한 반(反)세계적인 영성 안에서 훈련받은 홉킨스는 어떤 특정한 것들, 개별적인 것들, 특히 자연에 매력을 느끼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홉킨스가 예수회 신학생일 때 함께 살았던 한 예수회 수사는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 한다:

"홉킨스의 특별한 즐거움 중 하나는 신학원에서 대학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낙비가 지난 후 해가 다시 나오자 그는 달려가 반짝이며 부서지는 석영을 보기 위하여 구부리고 앉았다. ‘아, 참 이상한 젊은이네. 젖은 모래를 보기 위해서 그 문가에 그렇게 구부리고 앉아 있다니. 우리에겐 그저 평범한 자연에 불과한데, 홉킨스씨는...'"

자연의 것들에 대한 이 매혹, 이 감각적인 즐거움은 홉킨스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런 모습을 누르거나 고행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여겼다. ‘천상 것들’ ‘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데 자신을 일치시키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학을 배우는 시기에 웨일스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 도서관에서 스코투스의 저서들을 접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자비’였다.

스코투스처럼, 홉킨스도 옥스포드의 명석한 학자였다. 이 ‘옥스포드의 만남(연결)’에 관하여 후에 홉킨스는 ‘던스 스코투스의 옥스포드’라는 시를 썼다. 결국, 스코투스와 다른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홉킨스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육화론을 넓혀 나갔다.

 

사진출처=pixabay.com

홉킨스 "모든 아름다움은 그분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 사건은 계시였다. 또한 홉킨스가 로마 가톨릭이 된 이후 그를 계속 괴롭혔던 심각한 양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스코투스의 글을 읽으면서 그는 특정하고 개별적인 것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긍정의 관점을 발견했다. 홉킨스는 물질, 사물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이 발견을 그는 시와 일기 구절에 적었다. 일기의 한 구절은 자연에 관한 이 새롭게 발견되고 여유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집으로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별들이 총총하게 나왔다: 나는 몸을 젖히고 별들을 바라보았고 나의 마음은 보통 때보다 더 열려서 우리 주님을 찬미했다. 모든 아름다움은 그분을 향하여 그분 안에서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홉킨스의 시 자체가 스코투스의 육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 홉킨스 시인은 구체적인 것, 아주 미미한 것들까지도, 예를 들면 스토니허스트로 가는 길에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부서진 작은 자수정 따위까지도 주의 깊게 바라본다.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관점에서 이러한 태도가 의미를 갖는 까닭은, 작은 모래알까지도 성찬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성체라도 참으로 성찬례적이며, 사물, 물질에서 표현되는 주님의 육화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예수회 회원 홉킨스는 프란치스코 회원인 스코투스에게서 발견했고, 열쇠는 근본적으로 육화한 말씀의 인성이었다. 예수님의 인성, 더 단호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지체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의 요점이고, 창조의 표본적인 원인이다. 하느님은 이 예수라는 모형에 따라 모든 다른 것을 만들었다. 각자 그리고 서로 맺는 관계들은 모두 이 예수님의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행하면서 되어가는 것

모든 것들은 무엇인가 행한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이상한 말이지만,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행한다. 포도는 포도를 하고, 별은 별을 행하고, 화산은 화산을 행한다. 각자는 이렇게 행하면서 자신이 되어간다. 자신을 행하는 것이다. 홉킨스는 이것을 ‘행하면서-되어가는 것’이라고 부른다.

이 행하고-되어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생긴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아마 경험하기도 힘들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표현하려고 애쓰는 대신 무슨 의미가 아닌지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왜 그런 것인지 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래알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모래알은 단지 그리스도의 상징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래알이 작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생각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매우 익숙한 종교적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는 셈인가? 우리는 모래알에 관한 형용사 (‘작은’)를 그리스도에 관한 형용사(‘겸손한’)와 동일시하고 추상화시킨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사물의 한 가지 속성을 그리스도의 어떤 속성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알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도토리 한 알이나 작은 토마토 하나도 그런 작업을 해 볼 수 있다. 모래알, 도토리, 토마토 등은 다 없어도 되고, 바꿀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훈을 가르치기 위하여, 보통은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설교가의 도덕적 표본이라는 익숙한 범주 앞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래알, 도토리나 토마토 그 어떤 것을 사용하든 간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면, 사물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어떤 속성이나 측면, ‘겸손’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다른 묘사를 참고 시켜주는 역할밖에 못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물론 전혀 문제가 없지만,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존재에 관한 유추론에 근거하여 자연을 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관점에서 더 흔한 접근방식이다. 토마스철학은 참다운 실존이 오로지 하느님 안에만 존재하고, 따라서 다른 모든 실존은 하느님의 참다운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진정한 실존을 향하고 그것을 가르치지만, 오직 약하게 간접적으로만 가리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홉킨스를 뜨겁게 달군 것은 (비록 스코투스를 읽으면서 표현하게 되었지만) 모래알이, 자기 자신을 있게 하고 행하면서,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창조하시는 말씀을, 즉 그리스도를 육화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앉아서 ‘작은’ 혹은 ‘겸손한’ 것에 관해 숙고하지 않아도 아주 잘 일어난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은 모래가 모래를 하는 것이다. 모래가 형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래알이 모래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아름다움 그 전체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런 저런 측면, 작음 혹은 겸손 등 어떤 측면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행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존재의 단일성’이라고 알려진 스코투스의 심오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스코투스와 홉킨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진 이 인식은 사물에 관한 우리의 깨달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다. 제이 힐리스 밀러는 이것에 관해 더 명료하게 설명한다:

"존재의 단일성이라는 개념은 자연에 대하여 토마스철학과 다른 관점으로 이끈다. 단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인 것들은 유래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창조주의 존재 안에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자연 사물들은 창조주와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창조된 것들은 각각 그것의 고유한 방식대로 창조주의 전체 모상을 표현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어떤 측면 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름다움 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자연에 대한 관점은 사물들이 어떤 특정한 상징물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것을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서사시에 이르도록 한다. 똑같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움 안에서 모든 것들이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온전히 

일기의 또 다른 구절에서 홉킨스는 이러한 개념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야생초보다 더 아름다운 풀을 본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풀에 의해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이나 나나 홉킨스 등 누구나 자연을 관찰하고 참여하는 사람에게 다른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제는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피조물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얻는 것이 아니다. 과제는 기본적으로 관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행하는 것을 가까이, 주의깊게, 섬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들을 행하고 존재할 때에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하고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그것들의 고유한 방식이다. 다시 한번, 홉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를 행하고;
은총을 지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은총 속에 보존하는 것;
하느님의 눈에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 그리스도로"

각각이, 개별적이고, 특정한 것이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것을 행한다. 자기 모습대로 존재하고 행하는 것, 옆에 있는 것이나 위에 있는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모습으로 행하고 존재할 때에 고유한 자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볼 때에 그 고유함을 깨닫는다.

토마스철학의 더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는 두 가지 구성요소가 있는데, 질료와 형상이다. 포도의 경우를 보면 형상은 ‘포도다움’ 이고 질료는 단맛, 설탕과 껍질, 둥근 모양을 만드는 물리적 속성들이다. 스코투스는 세 번째 요소를 덧붙인다. 그것은 이 포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 여기에서 우리는 육화의 필연적 귀결을 본다: 영원한 말씀이 이 유다목수의 아들로 육화되었다는 귀결이다. 고유하고, 반복될 수 없으며, 특정한 창조물이 바로 육화한 창조주이다.

스코투스의 관점에 따르면, 가까이, 정밀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주의 깊게 보는 것은 계시적인 행위이다. 이것은 참으로 관상의 행위이다. 사물을 깊게 응시하면 그리스도를 일별할 수 있다. 이와 가까운 유추는 전통적인 성체신심이다. 성찬례의 축성된 빵을 응시하고 초대를 숙고하면서 ‘하느님의 어린 양’, ‘자, 여기 그리스도가 계시다!’: 밀가루로 구운빵, 포도를 부수어 만든 쥬스. 여기 보통의 근동지방 빵이 있다: 여기에서 우주의 창조주를 본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 잎, 이 돌, 이 분자, 이 손, 이 창문을 통해 흐르는 희미한 이 빛을 응시하라, 그리고 바라보라, 보라: 피조물과 창조주가 놀랍게도 하나가 되고 함께 현존한다, 피조물로서 혹은 창조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서.

홉킨스가 친구에게 썼듯이, “하느님의 육화에 의하여 모든 생명의 하찮음이 폐기되고,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존재해야 할 모습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리암 J. 쇼트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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