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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신부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1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지난 2014년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실시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과제에 대한 의견 수렴’ 조사 결과를 다시 읽어보았다. 교황 방한 이후 한국교회가 변화하기 위한 중심 주제로 응답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교회’를 꼽았다.

기사를 읽고 나니 문득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 않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나? 무엇이 우리의 실천을 가로 막고 있나? 이 글은 그에 대한 성찰이 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가?’하고 물으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 안에 계시다’라고 답한다. 옳은 말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사신다.”(655항)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내 안 말고 또 어디에 계신가?’를 물으면 긴 침묵이 이어진다.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만나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내 밖에’도 계시다는 사실에 무심한 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만 집중할 때에, 이는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교리서의 내용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당신의 현존(現存)을 지속해 가신다는 의미이지,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신자들의 마음 안에만 계신다.’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제한하려는 의도의 문구가 아니다.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의 방식에 대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제 양성 교령>(Optatam Totius)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영성 생활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공의회의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은 앞으로 세 가지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묵상하는 것과,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또한 ‘작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46항)

<사제 양성 교령>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을 빌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 세상에 현존(現存)하신다. 말씀 안에, 성사와 전례 안에, 그리고 ‘작은 이들’ 안에서이다. 하랄트 바그너(Harald Wagner)는 그리스도의 이 세 가지 현존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활한 분의 현존은 성령을 통해 중재된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선포 중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곧 말씀 안에 현존한다.… 부활한 분의 현존을 입증하는 두 번째 형태는 성사다. 이는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드러난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반복해 말하지만 특별한 관점에서 가난한 이들의 무리가 존재하는데,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이들은 이 세상에 가려진 하느님의 얼굴이다(참고 마태 25,31-45의 최후 심판)."(하랄트 바그너, <일반인을 위한 교의신학>, 가톨릭출판사 2017)

그리스도의 ‘말씀 안의 현존’과 ‘성사 안의 현존’이라는 두 주제는 특히 교회론과 관련하여 교의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St. Ignatius Antiochenus)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교회도 있다.”(Ubi Christus, Ibi Ecclesia)라는 선언은 교회론적 성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개신교 신학 안에서는 쟝 칼뱅(Jean Calvin), 칼 바르트(Karl Barth), 루돌프 칼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등에 의해 말씀 혹은 케리그마의 선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가 강조되어 왔다.

이에 비해 가톨릭 신학은 성찬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노선 위에서 교회를 ‘원성사(Ursakrament, 原聖事)’로 보았던 오토 젬멜로트(Otto Semmelroth)와 칼 라너(Karl Rahner), 그리스도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로 본 에트바르트 스킬러벡스(Edward Schillebeeckx) 등을 통하여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해 왔다. 이러한 논의는 그리스도의 현존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대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작은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주류 신학의 논의에 반영되지 못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작은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작은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마태 25,31-46에서 예수 자신에 의해 선포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31-46)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 즉 ‘곤궁에 처한 이들’과 동일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내가’ 굶주렸고, 목말랐고, 나그네였고, 헐벗었고, 병들었고,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반복(35-36절; 42-43절)하여 강조하는데, 희랍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 의미는 한층 더 강렬해진다.

36-37절을 직역하면,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너희는 나를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는 나에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이다.

같은 방식으로 42-43절은 “내가 ~했을 때 너희는 나에게 ~하지 않았다”를 여섯 차례 반복한다. 이 본문은 사도 9,4과 함께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고난 중에 있는 이와 동일시하시는 대표적 구절이다.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신다. 두 본문을 종합하면, 예수께서는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 그리고 당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태 25,31-46의 맥락 안에서 ‘작은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많은 권고, 칙서, 담화, 강론 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그 중 몇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니다."(<복음의 기쁨>, 24항)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강생이 형제자매들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복음의 기쁨>, 179항)

"그리스도의 몸이 가난한 이들 안에 있기에,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의 육체적 활동을 통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찾아 주어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집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6년 사순시기 담화」, 2015. 10. 4.)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 그리스도는 말씀 안에, 성사와 전례 안에,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 계신다.

교회는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왕’인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하는데, 예언직 수행의 핵심은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이며, 사제직 수행의 핵심은 성사와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사목직 수행의 핵심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섬기는 일이다. 


* 이 글은 김유정 신부가 2017년 12월 10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정평위가 개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제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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