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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 "편협한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평화"[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한반도에서 시작하는 동북아 평화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가 초유의 군사적, 외교적 긴장 상태를 팽팽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또 이 3강 사이에서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북한, 그리고 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눈치 보기와 줄타기를 하며 균형을 잡기 위해 골몰하는 한국이 각기 팽팽히 겨루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현실 역사란 일관된 진리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갈지(之) 자 걸음을 걸으며 변화하는 현상임을 보게 됩니다. 불과 70년 전까지 적으로 대치하며 수백만 명을 죽이고 파괴하던 미국과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며 어깨동무를 하고 양국의 국가원수가 상대국을 방문하며 서로 애정공세를 펴고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6.25 전쟁 때 수십만의 중국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중국과 세계 최대의 무역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가와 통치권력

사전에서 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통치권을 갖고 있는 공동체, 나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국가는 통치권을 가진 공동체로 풀이됩니다. ‘국가는 국민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주체다.’ 이 말에는 국가가 국민 위에 서고 국민은 국가에 추종해야 하는 아랫사람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가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인간 집단들이 그때그때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기도 하고 해체시켜오기도 한 것입니다. 혈연 중심인 씨족 사회에서 시작해 부족 사회, 부족 연합을 거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가 생겼고, 강력한 군주가 나서 여러 집단을 통치하는 왕정이 되었으며, 이어 여러 군소 국가를 하나로 지배하는 제국이 생겨났습니다. 근대에 와서 제왕은 사라졌으나,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 국가(nation state)’가 이를 대체하였습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 대전을 겪으며 인류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인간 생명을 멋대로 박탈하거나 훼손할 권리는 없다. 즉 국가도 인간 생명과 기본권을 마음대로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수 천만 생명의 죽음과 고통을 통해, 인간 생명은 국가보다 우선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자각에 기초하여 1948년 12월 8일 유엔에 모인 50개국 정상은 <세계인권선언문>을 채택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국가라 하면 아주 숭고하고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고, 국민 모두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해왔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을 존경하며 애국자라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온 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가 과연 그리 신성하고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유엔에서 세계 50여 개국 대표가 모여 남한 단독 선거를 가결하고 국민 투표로 1948년에 정부가 설립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국호도 정해졌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가 여러 가지로 나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민 총선거를 통해 즉 민의(民意)로 구성된 정부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권은 그해 10월 17일 제주도에 좌익세력이 많다며 제주도에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좌익 무장대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하며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하였습니다. 그 결과 제주도민 10%이상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같은 시기 전국 각지에서도 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 북한군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명목으로 무려 20만 명 가까이 학살 당했습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습니다. 이어 합법적 선거를 통해 제2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정국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제2공화국은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들의 쿠데타로 일 년여 만에 전복되었습니다. 처음에 군인들은 질서가 바로 잡히면 자신들은 제 자리로 돌아가고 국민의 선택에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남아 권력을 차지하고 정부를 불법적으로 인수했습니다. 그 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모든 세력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제거하다 대통령 자신이 저격당했습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권력 독점을 이어가기 위해 12.12 사태라는 제2의 쿠데타를 일으켜 제5공화국 체제를 출범시켰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이 형성될 때까지의 중간 과정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국가는 국민 전체의 행복, 생명, 재산과 안전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기능하는 양상을 보면 제한된 극소수가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일하기보다 소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비합법적 폭행과 범죄를 일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가 섬기고 보호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 스스로 유린한 사례들이 허다했습니다. 그러니 국가를 국민이 무조건 추종하거나 순종하여야할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의 기본권을 마음대로 침해할 절대 권위를 아무한테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마치 그런 권위를 받은 것처럼 행동해 왔습니다. 권력자들은 고대에서부터 자신들이 제정한 여러 법률체계와 상징물을 통해 국가를 신격화 해왔습니다. 왕정시대에는 임금이 신에게 직접 권력과 위엄을 선물 받은 신성한 존재임을 백성들 뇌리에 각인시키기 위해 제관 직무를 겸임하였습니다. 이는 몇몇 인간들이 받들어 세운 국가를 신의 작품으로 신격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현대에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권력자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국가에 초월적 권위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들의 공동체인 국가를 근거 없는 신화에서 해방시킬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지상에 평화를 건설하려면 우리 모두가 신격화된 국가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신격화된 국가의 허상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국가를 초월하는 더 높은 궁극적 가치를 향하는 전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국가 권력도 국가를 현실 가치체계의 최고 순위에 놓지 말고, 국적 ·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전망을 열어갈 수 있을 때 세상에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와 나라의 마찰과 분쟁은 세상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강우일 주교. (사진=한상봉)

국가와 영토 “땅은 하느님의 소유다”

현재 세계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곳은 중동 지역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긴장과 갈등이 끊이지 않아 애꿎은 노약자들만 계속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리아는 내전이 심각하여 지난 여러 해 동안 10만 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죽었고, 20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난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라크 수니파 중심으로 무장 세력들이 아이시스라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만들었다며, 많은 사람들을 잔인무도하게 죽이고 내쫓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 간 갈등 등 여러 원인이 작용하였지만, 본질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망입니다. 이들은 이를 위해 끝없이 전투를 벌이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 왔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이런 참혹한 비인간적 폭력 사태를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중동 지역은 고대에서부터 여러 제국들이 서로의 땅을 놓고 빼앗기 위해 각축을 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은 나그네로 떠돌다 노예생활 하던 에집트를 탈출한 후 모세의 인도 하에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겨우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이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줄로 기대했으나 그곳에는 이미 여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티나 원주민들과 수많은 갈등과 전투를 거친 끝에 이스라엘 왕국(기원전 1050년 경)을 세우기까지는 무려 2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얼마 안 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했고, 남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오스만 제국이 차례로 이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1920년부터 1948년까지는 이 지역을 영국이 지배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새 정부가 다스리고 있긴 하나, 팔레스티나의 긴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땅이 유다인만의 것이라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은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것이지 땅 자체에 대한 절대 소유권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 전통에서 땅은 본디 인간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 보면 땅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잠정적으로 인간에게 관리를 위탁한 하느님의 소유이지, 인간이 이를 영구히 자기 것으로 만들 자격은 없습니다. 사정이 어려워 땅을 남의 손에 넘겼다 해도 희년이 되면 땅은 원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입장입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땅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십일조 규범도 땅에서 얻은 모든 복이 다 그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복에 감사하는 뜻으로 봉헌하라는 의미입니다. 일곱째 해는 경작을 하지 말고 고아와 과부나 나그네들이 굶주림을 해결하도록 하라는 안식년 규범도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힘없는 이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니 아무도 땅의 권리를 독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평생 나그네살이를 했지 땅 주인이 되어 대지주 노릇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는 이사악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 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창세 26,3)

하느님은 이사악에게 땅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지만 그곳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라 하십니다. 후에 이사악의 아들 야곱이 요셉을 의지하여 에집트로 내려가 파라오를 만나는데, 파라오가 그의 나이를 묻자 야곱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제가 나그네살이 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 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창세 47,9) 야곱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일생을 ‘나그네살이’로 인식합니다.

나그네라는 자아 인식은 인간이 이 세상을 잠시 스쳐 지나는 여행객으로 이해하는 표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함께 하는 인연일 뿐 영구하고 절대적 소유와 종속의 관계가 아님을 말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평생 나그네로 살도록 부르신 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땅덩어리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초월한 자유로운 삶,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믿음의 삶으로 초대하신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섬기기보다 그 땅이 주는 소출과 부에 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면서 일찍부터 그곳 땅을 일구어 오던 농경민들의 관습과 그들이 섬기던 종교까지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회적, 물질적 제도와 탐욕까지도 모두 넘겨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형제적 우애와 연민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기보다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괴롭혔던 착취와 수탈의 체제를 답습하여 동포의 땅을 빼앗고 재물을 축적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이방인들에게 모든 땅을 다 빼앗기고 사방으로 끌려가고 쫓겨 가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새로운 땅을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이사 65,17.25)

예언서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와 전망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집착하던 약속의 땅은 팔레스티나의 한 땅덩어리를 초월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종말론적 땅으로 탈바꿈되어야 함을 예언자들은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백성이 그토록 매달리고 되찾으려 했던 땅을 ‘하늘나라,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왕국’으로 대체하십니다. 여기서 하늘은 땅의 것들과 크게 대비됩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땅과의 인연을 끊고 이 땅을 초월하는 새로운 땅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마태 6,19)

예수님은 당신과 당신 제자들이 근원적으로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예수님은 땅에 사시지만, 땅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하느님의 땅으로 도약하여야 할 존재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이어받아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는’(히브리 11,13) 인식 하에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리 13,14)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동북아 현실과 교회의 역할

과거 AFKN이라는 미군 방송을 들을 때 Far East Network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은 100년 전까지 자국의 서쪽에 태평양이 있어 아시아에 관심이 적었습니다. 미국의 시선은 항상 동쪽인 유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인들은 한국을 볼 때,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넘어 그야말로 땅 끝에 있는 먼 나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과 북한의 도전으로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이 깨질 조짐을 보이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북아에 다시 눈길을 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중국의 현상타파 전략에 맞서 미국은 이 지역에서 패권국으로서의 위상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을 강화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군사적, 외교적 역학을 최대한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합니다. 그런데 정치지도자들의 국가 의식은 너무 근시안적이고 짧은 역사적 파장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각국 지도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매달리는 한, 상호 고조되는 긴장과 갈등, 군비 경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세상에 평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각국의 지도자들과 국민 모두가 편협한 국가주의를 넘어설 때 비로소 평화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강우일 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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