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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김지환 칼럼] 

교황은 공산주의자?

“자유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우리 아이들에게 사회주의 경제론을 물들이고 사회주의적 경제 신봉자를 만들고 있다.” 한 야당 국회의원은 ‘사회적 경제’를 두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 발언은 무식과 무개념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러더니 그 당 사람들 새해 벽두에는 한 은행 달력에 그려진 초등학생 그림에 있는 인공기를 두고 또 한바탕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가 누가 이야기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래의 글을 보았다면 또 뭐라고 망발을 했을까?

“자유 경쟁은 자멸을 저질렀으며, 경제 권력이 자유 시장을 뒤덮고, 이윤 추구의 욕망은 고삐 풀린 지배의 야망으로 이어져 전반적인 경제생활은 끔찍할 정도로 어렵고 잔인하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더구나 국가와 경제의 본분과 의무가 수치스럽게도 혼동되어 심각한 해악이 초래되었으며, 그중 최악의 사태는 국가 권위의 격하였다.

모든 당파적 논쟁을 초월하여 여왕과 같이 다스리고 정의와 공동선에만 전념하는 최고의 중재자가 되어야 할 국가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고 말았다.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 동일한 샘에서 두 개의 물결이 흘러나왔는데, 그 하나는 경제적 ‘민족주의’ 또는 더 나아가면 경제적 ‘제국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조금도 덜 유해하거나 덜 혐오스럽지 않은 금융상의 ‘국제주의’ 또는 ‘국제적 제국주의’로서 후자는 이익이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공황 직후인 1931년에 발표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 주년>의 한 구절이다. 이 회칙은 당시 세계를 파멸로 몰고 온 ‘돈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1891년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마저 당대에는 ‘붉은 교황과 일부 사제들이 만든 붉은 문서’라며 매도당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몇몇 심중한 발언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매도당했는데, 그는 전임 교황의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현안에 맞추어 이야기했을 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연변이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자본주의 비판의 전통에 서 있을 뿐이다. 교회가 보기에는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탐욕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심각했다. 교회가 자본주의의 폐단을 공격했다고 해서 반자본주의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을 테지만, 자본이 신처럼 받들여지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함이 가장 큰 문제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들

우상숭배의 핵심은 하느님을 대신해 숭배되는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하엘 엔데는 <모모>를 통해 불변하며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어버린 화폐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갈수록 가치가 줄어들지만, 돈은 스스로 가치가 증식하며 불멸성을 획득한다. 예전에는 성당이 들어섰던 자리를 지금은 은행이 대신한다. 이제 돈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린다.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이야기하지만, 물질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독일의 진보적인 프로테스탄트 역사학자 볼프강 비퍼만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쓴 <루터의 두 얼굴>(평사리, 2017)에서 성전 정화 사건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절대 자본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한다. 하지만 압도적인 자본의 힘 앞에 그리스도교는 무기력할 뿐이다. 하느님을 믿는다지만 기도 속에서 물질적 부를 갈구하며, 물질적 부의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심성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상품관계를 넘어서 애정과 연대로

자본주의란 좋든 싫든 우리의 현실이다. 언젠가 자본주의는 자본을 거부했던 조류라든가 아이콘도 상품화한다는 걸 직시하고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을 확인했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단지 역사적 구성물이다. 자본주의를 가장 비판했던 마르크스는 확실히 자본을 악으로 규정했다기보다 그것의 유효성에 주목했으며, 자본의 물신성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어쩌면 무신론자인 마르크스가 자본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했는지 제대로 파악했을 수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엉뚱한 것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일 텐데, 그 시작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품 관계를 넘어서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새해 벽두에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누가 당신의 이웃인가?’를 묻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영화를 통해 재현된다.

이웃을 위해 힘쓰는 이 다정한 아저씨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돈은 그저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니엘 블레이크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사무적 응대를 넘어선 애정과 연대가 상품 관계를 뛰어넘어 인간적 가치를 회복하고 모두를 이어준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해준다.

막강한 벽도 하나의 틈새가 열리고 그 틈새가 벌어지면 끝내 무너져 내린다. 당장은 막막하고 무엇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늘 깨어서 지치지 않고 가야 할 길을 찾아 발버둥친다면, 결국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골방의 침잠한 기도보다 바깥세상의 작은 몸부림이 더욱 힘 있는 기도요 신앙고백이자 그분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감히 이런 생각을 해본다.
 

김지환 파블로
출판노동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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