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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내리는 쇳덩어리 비의 기억<강철비>(2017, 양우석)

[진수미 문화칼럼]

‘강철비’는 군사용어 ‘Steel Rain’을 직역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은 M270 다연장 로켓 체계(MLRS, Multiple Launched Rocket System)를 개발, 1980년대에 실전배치를 하고 1990년대 실제로 사용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라크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이를 통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라크군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 무기는 공중에서 수천 개의 자탄이 광범위한 지역에 흩뿌려지는 효과를 낳으므로 '강철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영화 <강철비> 포스터

개연성 강한 정치적 상상력

영화 <강철비>는 허를 찌르면서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자랑한다. 군의 강성파가 획책한 쿠데타로 인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부상을 당한 채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북의 쿠데타 세력은 핵무기 개발의 성과를 현실화하기를 원한다. 이들은 미국과 남한에 전쟁을 선포한다. 남한은 임기 종료를 며칠 남긴 대통령(김의성 분)과 당선자(이경영 분) 간의 정권 교체기. 호형호제를 하나, 정치 철학이 상반된 두 정치인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이 모두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다.

남한 입장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북한의 쿠데타 성공을 저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지닌 권력자의 안위를 보장해야 한다. 엉겁결에 치명상을 입은 권력자를 남한으로 이송하게 된 북한군 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 분)는 청와대에서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곽철우(곽도원 분)의 도움을 얻어 권력자를 지키는 한편, 한반도의 평화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남과 북의 요원이 손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스토리는 기시감이 선명하다. <의형제>(2010, 장훈), <공조>(2016, 김성훈)의 계보를 잇는 영화인 것이다. 이들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한 요원을 세파에 찌든 능글능글한 캐릭터의 연기파 배우(송강호-유해진-곽도원)가 맡고 북한 요원을 시각적 쾌락을 견인하는 미남 배우(강동원-현빈-정우성)가 맡는 것이다. 남남북녀라고 하면서 왜? 우연한 일치는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러한 캐스팅이 북한을 여성화함으로써 타자성을 강조하는 관습으로 고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분단이 낳은 버디 무비

한국형 버디 무비라 할 수 있는 이 계보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래도 여성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한 포털 사이트의 배우 라인업에서 <의형제>의 경우, 단 한 명의 여배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공조>에서는 남한 요원의 가족으로 정황화된 캐릭터 장영남(잔소리꾼 부인)과 윤아(철없는 처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강철비>는 좀 더 나아갔다. 조연 리스트에 박은혜, 박선영, 안미나, 원진아 등을 올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강철비>에서 이들의 모습은 극의 중후반에 다다르면 거의 사라지기 때문이다. 강철 무기를 앞세운 외교와 안보 전쟁의 주역은 남성임을 웅변하는 것일까. 현실 정치에서 여성이 외교부장관이어도 대중문화의 재현은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영화에서 여성들은 생명정치를 담당하거나 컴퓨터 해킹을 하는, 의녀나 기계 교란자 같은 보조 역할에 머무른다. 어쩌면 이것이 21세기 초반 남북한의 알파 걸들이 처한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여타의 남북 공조 영화와 <강철비>가 구별되는 지점은 정치적 스케일이다. 북의 쿠데타는 곧 핵전쟁의 현실화로 이어지고 이에 한중일 삼국의 반응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미국은 최소 비용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를 쓴다. 복마전 같은 국제 정치의 면모는 앞선 영화에서 발견되기 어려웠던 요소이다.

<강철비>에서 남한은 강대국의 이해가 고래 등처럼 부각되는 가운데, 전전긍긍하는 새우처럼 재현된다. 미국의 극동 책임자와 화상통화를 할 때 미국 배우의 얼굴이 엄청난 사이즈로 클로즈업되지만, 한국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에 분통을 터뜨리는 미디엄 숏의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바로 이것이 현실의 국제정치 속 미국과 한국의 위상 차이를 시각화한 장면인 것이다.

 

영화 <강철비> 포토

전쟁과 평화, 그리고 분단과 통일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현재의 분단 상황에서 평화와 통일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라는 생각이었다. 특히 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작금의 현실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그것은 핵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핵전쟁이 나면 남한과 북한은 절멸될 운명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극소수가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평화와 통일을 지향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평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영화는 분단의 고착화를 현실적인 답으로 제시한다. 국제무대의 G2, 그리고 일본 모두가 분단을 원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을 접수하여 남한과 국경을 맞대는 데 부담을 느끼고, 미국은 중국의 세력 확대를 원하지 않는다. 일본은 북한의 위협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표층적 결말도 이러한 현상 유지적 평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의 선전포고에도 남한 주민들은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며 티타임을 즐기는 일상을 유지한다. 남의 철우는 놀랍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역설적으로 <강철비>는 한국인의 기억세포에 침잠되어 있던 전쟁에 대한 공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터이다. 보통의 관객과 동일시되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찻잔 속 태풍처럼 전쟁 공포가 소용돌이쳤으리라. 우리는 생존을 위해 표면적으로 공포에 적응했을 뿐이다. 휴화산처럼 보이는 공포가 활동을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까.

 

영화 <강철비> 포토

DNA처럼 각인된 전쟁의 공포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내게 <강철비>는 악몽 같은 기억을 소환하는 영화였다. 20세기 중후반부에 성장기를 보냈던 세대에게 전쟁 공포는 상존하는 현실이었다. 골목 빈터에서 무리지어 놀이를 하던 시절, 우리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군가에 맞춰 고무줄을 폴짝폴짝 넘었다. 집에서는 전쟁통 피난길에 오르는 부모의 손을 잡은 꼬맹이 역으로 언니들의 소꿉장난에 참여해야 했다. 그때 내게 주어진 것은 굶주리고 다리가 아파서 우는 역할이었다. 우리는 전쟁에 잠식당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도덕시간이 반공교육으로 채워졌던 시절이었다. 남파 간첩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이승복은 어린이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다. 나는 승복 어린이처럼 입이 찢어지더라도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되물었고, 비관적인 결론에 이르자 좌절했었다. 대학에 진학해서야 우리는 승복이의 저항 대상이 공산당이 아니라 ‘콩사탕’이었다는 농담으로 기성세대의 교육을 희화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서해교전 같은 상황에도 무덤덤한 자신을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레드콤플렉스의 억압에 노출되었던 영혼이 족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강철비>를 보며 나는 남의 철우가 북의 철우에게 “야, 너네는 두더지를 먹냐?”-음식에 대한 농담처럼 상대를 원초적으로 자극시키는 농담은 없다-와 같은 무신경한 농담을 던질 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행이라 비판하면서도 내가 지나치게 좌경화된 것은 아닌지, 자문했다. 또 잔치국수를 앞에 두고 북의 철우가 찬 수갑을 풀어주지 않는 남의 철우에게 저러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냥 풀어주면 큰일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열된 자신을 의식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강철비>의 잔치국수 신을 좋아한다. 남한 주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남북이 서로의 족쇄를 풀 수 있는지를 알레고리로 형상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불평등한 상황에서, 남의 철우가 상대의 자리로 이동하여 나란히 앉음으로써 동등한 단계에 이르렀다가, 수갑에서 완전히 놓이는 해방의 단계. 남한 주민의 정체성을 지닌 나로서는 현실적으로 공감이 갔다. 이러한 단계를 밟아나가면 모두가 쇳덩어리 폭우가 쏟아지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강철비>는 평화로운 통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그린다. 아름다운 하나됨은 <웰컴 투 동막골>(2005, 박광현)의 저 비현실적인 시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강철비>의 정치적 상상력을 그러한 공간으로 이동시키기는 어려운 것인가. 나는, 정신은 비판적이어도 의지는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그람시의 말을 좋아한다. 지금은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진수미 카타리나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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