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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희년, ‘사회교리 경시대회’를 제안한다

[한상봉 칼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7년 11월 19일부터 2018년 11월 11일까지 ‘평신도 희년(禧年)’을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번 평신도 희년은 설립 50주년을 맞은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 한다. 느닷없는 이 소식에 ‘이제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사람대접을 받는 모양’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주교들이나 사제, 수도자들을 위한 ‘희년’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으니, 그 이유는 간단하다. 희년이란 본래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자는 것이니, 지금 교회 안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받는 이가 ‘평신도’라는 말이 되겠다.

전대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교황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역교회의 주교들 권한을 인정해 주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교회 안에서는 다음 공의회가 열린다면 ‘사제들을 위한 공의회’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물론 그런 공의회는 아직 열리지 않았고, 내 생각엔 굳이 열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사목자들이 얼마나 복음적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비중심화’ 원칙만 잘 지켜도 충분하다. 이미 원칙적으로는 평신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나누어 갖고 있다고 선포했다.

문제는 축제를 열고, 이 기회를 찬스로 여기는 교회풍토라고 하겠다. 교회언론의 소식을 접하면 교계나 신자들이나 교구장이 지정한 어느 성지에서 어떻게 기도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지 홍보하고 있다. 조금만 신심을 보이면 연옥에서 받을 잠벌을 모두 면제해 준다니 나쁜 소식은 아니지만, 이건 사실상 떡고물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 2017년 봄호에서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권길중 회장이 인사말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 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는 성경구절을 다시 인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진출처=pixabay.com

평신도들에게 기쁜소식은 ‘전대사’를 받을 기회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여전히 슬픔과 고통 속에 놓여 있는 다른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만큼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 우리시대의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실이며 ‘표지’이다.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평신도였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았으며, 생태계를 수호하는 성인이다. 특별히 대림절을 맞아 어느 성당에서나 만들어 놓는 ‘구유’를 처음 생각해 낸 사람도 그분이다. 하느님은 ‘연약한 아기’로 오셨고, 우리는 연약한 아기를 돌보는 엄마로 아빠로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이 아기와 연대감을 느끼며 환대한 이들은 ‘미천한 목동’들이었다.

복음적 열정이 사라진다

많은 신자들이 이 성지 저 성지 기웃거리겠지만, 그곳엔 가난한 이들이 없다. 연약한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없다. 하느님은 이 천년 전 구유 위에 누워계셨던 것처럼 지금 짐승의 거처에서 짐승의 먹이가 되어 살아계신다. 춥고 외롭고 배고프고 아픈 자리에 그분이 계신다. ‘평신도 희년’이라니 뭔가 교회에서 받아먹을 게 있을까 쳐다보지 말고, 이참에 우리가 기쁨의 사람이 되어 슬픈 땅으로 가야 한다. 프란치스코가 폐허가 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일으켜 세웠듯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다시 재건해야 할 사명을 우리 시대 평신도들은 요청받고 있다.

단순히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서 ‘복음의 열정’이 사라지는 게 문제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고, 사제들은 관리자가 아니며, 신자들은 영업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산과 건강과 내세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십자가에서 죄없이 돌아가신 그분을 너무나 사모하기에 그분 운명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게 사랑이다. 그 사랑이 지극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부른다. 그들은 우연적인 ‘행복’(Happy)보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축복(Blessing) 안에 머물렀다. 그런 기쁨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고 나선 길이 ‘평신도 희년’이다.

 

안중근, 장일순, 김대중

권력에 저항하는 평신도

이참에 조규만 주교가 <평신도 희년 담화문>에서 평신도들이 레지오 마리애와 빈첸시오회, 꾸르실료, 연령회, 매괴회 등의 신심단체를 치하하고, 김홍섭 판사와 최정숙, 서상돈, 장면 총리, 선우경식 원장 등을 ‘훌륭한 평신도’로 기억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들은 혼자서 여럿이서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필요조건일 뿐 충분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4년 4월 27일에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을 나란히 성인품에 올렸다. 이분들을 ‘공의회 성인’과 ‘교황 성인’으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각각 비교적 진보-보수 성향의 교황에 대한 균형 있는 안배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규만 주교의 담화문에는 신심단체와 법조계, 교육계, 경제계, 정치계, 사회복지 차원에서 다소 무난하고 교계제도에 충분히 포섭된 분들만 거명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5년 5월 23일 우익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다가 1980년 암살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시복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남미 해방신학의 대표적 인물이며, 복자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인 전 단계에 해당한다. 이처럼 부당한 정권력에 저항한 인물을 한국교회의 평협과 주교들이 한 명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때는 서울대교구에서 시성운동을 벌여 한다고 들먹었던 안중근은 물론이고, 유신독재 정권에 목숨을 내걸고 저항했으며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까지 외면하는 것은 좀 심했다. 장일순은 또 어떠한가. 

‘평신도 희년’을 선포하려면,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누구에게나 호평 받는 이들도 중요하지만,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불의한 권력에 의해 고난을 받았던 ‘의인’들을 복권시키는 일도 교회의 몫이다. 예수님도 당대에 만인에게서 환영받지 않았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는 이야기만 한 게 아니다. 예수님은 정치권력과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담합하는 합법적인 강도들의 소굴인 예루살렘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살해당한 분이다. 예수님의 앞길을 하필이면 세례자 요한을 열었을까? 사실상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예언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복음서가 증명하고 있다.

 

사회교리는 ‘사이비교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에 평신도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지점에 있는 게 ‘사회교리’다. 평신도는 일상을 살면서 복음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발판인 이 세상을 잠식하고 있는 맘몬(재물신=자본)에 저항하는 책무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평신도에게 맡겨져 있다. ‘믿을 교리’가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책임아래 놓여 있다면, ‘행할 교리’인 ‘사회교리’는 평신도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 사회교리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터와 가정까지, 거리와 부엌에서도 필요한 교회 가르침이다.

그래서 ‘평신도 희년’의 과업은 먼저 모든 평신도들이 <평신도교령>을 맛들이고, 사회교리를 체득하는 일이다. 교구마다 ‘사회교리 학교’를 여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정작 여기서 사회교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사실 ‘안 배워도 잘 사는’ 평신도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세밀한 사회교리를 몰랐지만 이미 ‘사회정의’와 ‘하느님의 자비’을 받아들이고 분이며, 이 학교에서 자신의 믿음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지금은 평균적으로 사제들이 신자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본당에서 ‘사회교리’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제들도 있다. 아무리 교황청에서 발간한 <가톨릭교회교리서> 3편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교리라고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교리를 ‘사이비 교리’쯤으로 여기는 신자들에게 사회교리를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는 방법은 몇몇 관심자들을 모와서 사회교리 학교를 여는 것도 좋지만, 교구별 본당별 ‘사회교리 경시대회’를 여는 것이다. 예전에는 교구 차원에서 매년 ‘교리경시대회’가 열려서, 본당 주일학교에서 교사들은 다투어 학생들에게 교리와 성경을 가르쳤다. 이처럼 청년들과 성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회교리 경시대회’를 열어 두둑하게 상품도 마련한다면, 사회교리가 교회 안에 정착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학순 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1973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사목지침을 발표하고, 성경과 사회교리 문헌 중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1973, 분도출판사)를 교구 전 신자에게 나눠주고 외울 듯이 공부시킨 사례를 기억하자. 이 정도 열정과 구체성 없으면 사회교리는 여전히 ‘투명 교리’ 취급을 받을 것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의 발언까지 담아 놓은 <DOCAT-가톨릭 사회 교리서>(가톨릭출판사, 2016)같은 좋은 교재도 있다. 본당마다 경시대회를 열어 매년 평신도주일에 수상자를 발표하고 푸짐한 선물을 주면 좋겠다. 교구에선 사회교리 강사 교육을 하고, 이들이 가르친 본당 신자들이 모여서 경쟁을 벌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교구장 주교가 선물하는 매혹적인 상품을 걸고.

사회교리 공부하면 세상과 교회가 보인다

사회교리를 공부하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예수님 얼굴이 보인다. 하느님이 왜 강생하셨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지 알게 된다. 이천 년 전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도 평신도였다. 그분은 세상에 깊숙이 몸을 담고 계셨고, 예루살렘에 가서도 제사를 지내는 대신에 환전상의 탁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분에게 경건한 신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느님 이름을 팔아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사회교리를 공부하면 세상과 교회가 보인다. 세상과 교회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발견한다. 사회교리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일그러진 하느님의 얼굴을 곧게 펴는 지침이다. 사회교리를 공부하면 성당 안에서만 가능하던 신앙이 세상으로 확장된다. 평신도가 할 일이 너무도 많고, 그만큼 소중한 게 평신도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사실 그런 평신도들을 보고 교회를 알아듣는다.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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