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사막에서의 방황 "천막의 말뚝을 빼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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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막에서의 방황 "천막의 말뚝을 빼내십시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1.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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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믿음의 여정-2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을 시나이 사막에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빙빙 돌기만 했을 뿐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따금씩, 그들은 오아시스, 순간의 휴식, 생명을 찾곤 했다. 물론 그들은 정착해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세는, “아닙니다. 천막의 말뚝을 빼내십시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약속합니다”라고 설득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왜 우리가 당신을 믿어야 합니까?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을 수 있었던 에집트 생활이 더 낫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에집트로 돌아가고 싶은가?

믿음의 여행을 떠난 우리들이 느끼는 유혹은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옛날 노예 시절이 더 편했다. 거짓말과 죄에 얽매어 있을 때가 더 수월했다. 믿음의 여행을 하는 것보다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으로 살아 가는 것이 훨씬 쉬웠다”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만큼이나 에집트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한 때 밝은 빛 가운데서 보았던 것을 기억하라고 어둠 속에서 부르신다.

우리가 사막의 한가운데 있을 때면 주님은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경험한 변모의 순간을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도 허락하신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의심할 바 없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은총의 순간이며 종교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늘 그런 것처럼 다시 사막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2~3일 후, 아니면 2~3주 후에 그 경험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그것이 단지 우리의 상상이 아니었나 하고 의심하고 잠시 전에 한 경험의 기억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의심을 품었고 모세는 반복해서 하느님의 사랑은 하나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고 불평을 했다: “만일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왜 우리를 굶깁니까?” 그리하여 모세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님은 대답하신다, “내가 그들을 먹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에 하루 먹을 양만을 주겠다. 내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 먹을 양만큼만 주워야 한다.” 다시 우리는 사막의 중요한 교훈, 즉, 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그 분을 계속해서 믿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만나를 쌓아 놓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을 말씀하시길, “안된다. 오늘 하루치만 갖고 가거라. 너에게 매일 음식을 주겠다.” 이것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게 가르치셨다.

우리의 기질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우리는 늘 미래에 대해 준비하고, 우리 자신을 돌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지배하기를 포기하고, 매일매일, 아니 시시각각 그 분을 믿고 따르라고 하신다.

 

사진출처=pixabay.com

안전장치도 없이 따라가라는 명령

모세와 함께 사막으로 나간 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완전함과 강함을 느꼈다. 당신은 그들이 전진하면서 점점 더 강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약해지고 권태를 느꼈다. 사람들은 분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 같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난다. 우리에게서 모든 우상-보호수단, 모든 방어기제, 안전한 설명-등을 다 빼앗는다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말 왜소하고, 초라하고, 빈털터리다. 사막에서 주님은 우리로부터 우상을 모두 빼앗아 가셔서, 우리는 그 분 앞에 초라하고 겸손하게 나아가게 된다. 그런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느님은 누구이신지를 발견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토머스 머튼은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에집트를 떠나지만 그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홍해 해변가 멀찌감치 서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의 바다는 지나 왔으나 이제는 사막 가장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경험하긴 했으나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 적어도 우리 자신을 실제로 흔드는 어떤 모험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위험을 받아들이는 만큼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은 우리의 찬양이 필요하신가?

홍해를 건너기 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두려워 말라, 움직이지 말고 오늘 야훼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지켜보아라. 오늘 너희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에집트인들을 다시는 보지 않게 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해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그저 진정하기만 하면 된다”(탈출 14,13-14).

오늘날 주님은 똑같은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신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고, 진정하고, 하느님이 하느님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워 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분이 싸우실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전쟁 무기를 내려 놓고, 창과 방패와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야훼를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놓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야훼는 힘있게 나를 붙드시어 나를 살려 주셨다. 내 하느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으랴! 나의 선조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우러르지 않으랴! 야훼는 용사, 그 이름 야훼이시다.”(탈출 15,1-3)

초기의 전례 성가인 이 곡에 눈여겨볼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찬양이라는 사실이다.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곡이다. 대조적으로 현대 교회 전례에서는 열광적인 찬양이 거의 빠져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다. 이런 식의 찬양은 아주 세련된 우리 자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한다.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운다. 하느님은 우리의 찬양이 필요하신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물론 하느님께는 찬양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삶을 참으로 아름답게 하는 것은 필수품이 아니라 쓸모 없는 선물들이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은 연인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을 교환 하는 순간에 볼 수 있다. 자신을 주는 과정에서 사랑이 싹튼다. 선물을 주는 가운데서 은총이 생긴다.

하느님께 우리의 찬양이 필요한지를 묻는 이들은 그 분이 우리의 경배도 필요로 하시는지 묻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앉아 있는걸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45분간 우리가 교회에 앉아 있었다고 더 행복해 하시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배가 하느님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경배의 목적도 그것은 아니다. 경배, 특별히, 성찬례는 서로 자신을 내어주는 시간이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이며 갈망을 교환하는 시간이다.

일요 미사에서 일주일간 자신들의 삶을 천천히 내어놓았던 우리는 삶을 내어 준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모인다. 우리는 상징적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우리의 약함을 고백함으로써 오만함을 버리고, 그 분의 말씀을 갈구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드리고, 우리 자신이 빵과 포도주 속에서 부서지고 부어지는 것을 본다. 그 대가로 주님은 우리에게 치유와 용서를 주시고 말씀의 지혜를 주시며 성체 안에 당신의 인격저긴 현존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것, 아름답고 멋진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척 지루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미사의 기도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경배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그 분 손안에 놓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형식적인 예식을 들먹이고 돌아다니는 것이 내적인 경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전단이나 기타, 행렬 혹은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사람들을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의 효과를 믿는다면 당신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진정한 경배는 그런 장식품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영감을 받을 뿐이다.

출애굽의 후반에 나오는 금송아지의 일화가 의미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그런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접촉이 끊기자 자신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임을 상기시킬 수 있는 대체물을 만들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절을 하고 숭배를 드린다. 그것도 아주 열성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진실은 주님과의 접촉이 끊겼다는 것이다; 금송아지에 대한 그들의 열광은 신-인간 사이에서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는 상호작용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충실함

이야기가 너무 앞서가 버렸다. 히브리인들이 있는 홍해 바다가로 되돌아 가자. 이 시점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누가 그들을 구원했고 해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고 있다. 그리하여, 에집트인들이 패한 것을 본 후, 하느님이 그들에게 내려준 승리를 경험한 뒤, 이스라엘인들은 “야훼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출애굽 14,31). 그들이 하느님만을 믿었다고 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인간도 함께 믿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같이 가야 한다. “하느님과 나”만이 아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신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한편 이웃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 두 가지 요소는 서로 같이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그 공동체를 믿음의 공동체,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부르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 공동체의 믿음 생활은 사랑과 신뢰에 바탕을 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믿음의 생활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과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함께 나누는 이웃에 대한 충실함에 바탕하여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러했다. 그들은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 역시 충실해야 했다. 출애굽 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과 서로서로에게 어떻게 충실해야 했었는지를 요약해 놓고 있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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