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들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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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들에 대한 사랑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8.01.0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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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여원장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영감을 받도록 하느님께 기도한다면 나는 모든 집 문간에서 속죄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이들 안의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보다 그들에 대한 내 마음이 순수해지기를 더 기도할 것입니다.”

군중 속에서 관상가를 가려내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지 않고 우리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집중하면 된다.

삶에서 우리의 역할은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조차 아니다. 물론 그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우리의 목표는 해로운 안건인 자아로부터 다른이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깨달음을 향해 회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가로운 기도가 아니다. 열려진 영혼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낯선이, 외국인, 나그네 등-이 나의 안전함을 위협하고, 피라미드 같은 사회적 통제의 세계에서는 쉽사리 나타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누가 이런 상황에 책임이 있는지 알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고안한 절대적인 것들 위에 세워진 체제를 국외자들이 위태롭게 하도록 허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화의 매우 초기에 세계가 우리 마음대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문화의 규범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문화의 정점이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광신적 애국주의에 숨이 막히고 있다.

그 메시지는 그저 암시적이지만 분명하다: 즉 다른 문화들은 거의 “현대적”이거나 “진보적” 혹은 “발전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문화처럼 문명화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른 민족들은 우리만큼 영리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하다. 다른 인종들은 거의 인간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성취에도 계급이 있다. 역사는 그걸 보여주는데 경제가 말하고 권력이 그 사실을 주장한다, 우리가 바로 최고라고.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와 “그들”이라는 말은 피난민, 이주자들의 시대를 말해주는 표지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연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서로가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참으로 우리들은 지금 하나의 세계에 살고있으나 복잡하게 얽혀져 있으며 고통스러운 계층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그들의 종류와 몇몇 우리의 종류로 이루어진 도시, 이웃이 가득찬 세계이다.

존엄성과 안전 속에 살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자연적인 권리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기다려야 하며 혹은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해야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에게 결핍된 것을 우리가 다 써버리는 것을 보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것 가운데에서 몇몇 우리를 나머지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세계는 결국 직업의 투쟁, 식량 보조권에 대한 갈등, 물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일은 민족 말소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문제는 한 측면일 뿐이다. 영적인 문제가 또 다른 측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영적 투쟁들, 영적인 전쟁들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전쟁들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인사이더, 아웃사이더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를 보면 그러한 구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 도시, 전 세계가 우리 거실에서 살고 있다. 전 도시, 전 세계가 내 마음 속에서 전쟁을 하고 있다. 오직 관상가들만이 그들의 열려진 마음에 따라 안전이 결정되는 그런 세계 속에서 잘 살고 있을 뿐이다.

가지고 있는 종교가 파벌주의인 사람들에게는 이방인들보다 더 위협적인 인생의 몇가지 일들이 있다. 그리고 나그네보다는 관상가들에게 이런 일들이 더 확실하게 보여진다. 관상가는 다른 이에게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본다. 하느님의 새로운 말씀은 현세의 세계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 그 이면에 있는 거룩한 신비의 굴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나그네를 통하여 그 빛이 더 선명하게 비쳐진다.

관상가에게 나그네는 토비아의 천사이며, 아브라함과 사라의 천막을 찾은 방문객이고 정원에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하고 우리를 알 수 없고 예견 할 수 없는 삶에로 부르는 목소리이다. 인생에 관한 우리의 모든 선입견을 무장 해제시키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고정 관념들을 꿰뚫고 들어오는 사람은 나그네이다. 나그네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의지를 시험하는 사람은 낯선이들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나그네에게 우리의 마음과 문을 열어야한다. 나그네 안에는 우리의 좁혀진 마음을 파벌주의가 홀로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게 열라고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평화 속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평화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하며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으로 가득찬 우리라면 그 분처럼, 더 하지는 못해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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