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칼럼 유대칠 칼럼
"비우라"던 예수의 품이 그립다.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0]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저마다 누군가를 이기려 하고, 그 승리로 행복감은 누리려 한다. 행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패배자가 되어야하고, 그 아픔을 거름 삼아 누군가는 행복한 그런 잔인한 세상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이젠 일상의 평범한 모습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지마라! 이겨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우선 이기면 된다. 그러면 그것이 답이다. 이 잔인한 현실이 이젠 정말 피하기 힘든 일상의 모습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참 힘들다. 항상 이기기 위해 신경써야하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 신경 써야 한다. 누군가 얼마나 나를 따라오고 있는지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추적하고 있는지 쉼 없이 경계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마저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너희 반에서 몇 등이냐! 이 말이 그 아이가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어가는 참 힘든 세상이다.

종교는 좀 다른 세상인가?

막연히 종교는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신부님은 다를 것 같다. 우리 목사님과 스님은 다를 것 같다. 수녀님과 수사님은 아예 다를 것 같다. 나를 그렇게 보지도 않을 것 같고, 스스로도 그러한 잔혹한 세상의 틀에서 자유로울 것 같다. 날 그렇게 보지 않을 곳이니 왠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고,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으면 스스로 너무나 자유로이 행복을 누리는 이들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요즘 언론으로 접하는 소식들이 참 슬프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불법 감금 및 비자금 조성 혐의로 한 신부는 징역형을 받았다. 가난한 이에게 돌아가야 할 돈으로 자신의 비자금을 만들었다, 신부가 말이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스스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우리에게 온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신부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낮은 자의 몫으로 자신의 비자금을 만들었다 한다. 참 서글프다.

그뿐 아니다. 가톨릭 정신으로 운영된다는 어느 대형 병원의 수녀는 제약 회사로부터 수억대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가톨릭 신앙으로 운영된다는 병원에서 그것도 현세의 욕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수녀가 참아 믿기 어려운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단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정신으로 운영되고 유지된다는 몇 곳의 대형 병원에선 인권유린과 노동 탄압이 있었단다.

서글프다. 그들도 사실 다르지 않았다.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잔혹한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했고, 조금 비도덕적이라도 조직의 성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비자금을 조성하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손해는 어쩔 수 없다. 미안해할 것도 아니며, 자신들의 성공에 대하여 오히려 이런 저런 딴지 거는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조금 비도덕적이라도 어쩔 수 없다. 착하지 않아도 조직이 우선이다. 그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William of Ockham

에크하르트와 오캄의 외침

종교에게 우린 안식처를 구하려 했는지 모른다. 비워져있는 곳, 잔혹한 세상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비워진 곳, 이기려는 욕심과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아닌 곳, 그런 이 세상을 힘들게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비워진 곳,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그곳에서 쉴 수 있는 곳, 어쩌면 종교에게 우린 그런 비워진 곳의 모습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경제적인 기반도 힘들었다. 이때 교회는 교회의 단단한 구조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교회를 위해 말이다. 그때 두 명이 이러한 교회를 두고 소리쳤다. 우리의 본질은 원래 가난이라며, 가난 속에서 참 자유를 누릴 것이라 에크하르트가 소리쳤다.

교회를 위해 더 부유한 교회가 될 것이 아니라, 비워져있는 교회, 누군가를 이기며 행복을 우리는 이 세상의 잔인한 논리와 욕심이 전혀 없는 모든 이들이 그 잔혹한 논리에서 나와 참 자유를 누리며 쉴 수 있는 가난을 소리친 에크하르트가 있다. 또 한 명은 쓸데없니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교회를 두고 이제 그 쓸데없이 가득한 곳이 하느님을 향한 신을 가로 막고 있다 오캄이 소리쳤다. 우리 삶을 무겁게 하는 쓸데없는 것을 버려야 한다 소리친 오캄이 있다. 가난하자는 에크하르트의 외침도 버리고 살자는 오캄의 외침도 서로 다른 옷을 입었지만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예수의 품으로

무엇이 정말 교회다운 교회이고 종교다운 종교일까? 실망하는 신도를 두고 이런 저런 어려운 신학의 논리로 무지를 탓하며 말조심하라는 이도 보았다. 신학이 이 타락과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어려움, 인권유린과 노동탄압 앞에서 무력하다면,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한 합리화의 수단일 뿐이라면, 그 신학은 신에 대한 학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신의 이름을 가장한 종교 조직의 변명이며 언어유희일 뿐이다. 오캄이 소리친 쓸데없이 가정한 버려야할 말장난일 뿐이다. 에크하르트가 가난을 위해 버려야할 것으로 말한 욕심일 뿐일지 모른다. 그런데 오캄과 에크하르트가 버리라 한 그것이 지금도 버려지지 않고 있다.

다시 교회와 종교의 본질을 생각한다. 이 힘든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너무나 가난하여 이 세상 어디에도 자리가 없어 말구유 위에 가난한 존재로 하늘나라의 큰 영광의 자리를 모두 버리고 이 세상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을 자리로 예수는 왔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비워져있는 예수가 가난하고 힘든 삶으로 울고 있는 우리네 민중의 눈물에 가장 좋은 벗이며 위로였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거대한 건물 화려한 장식 속 엄청난 가격의 악기로 연주되는 그런 웅장함이 아니었다.

비워져있는 예수의 품이 너무나 간절히 그리운 요즘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유대칠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