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사람을 회복하는 한 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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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사람을 회복하는 한 해 되기를
  • 김경집
  • 승인 2017.12.2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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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염치와 인격을 잃지 말아야

2017년 최저시급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7,530원이다. 여러 강의 때마다 최저시급을 물어보면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물다.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직업군이 교사와 공무원이다. 고용이 안정적이고 연금까지(물론 연금이 선물이 아니라 월급에서 공제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자나 안정성을 따지면 다른 이들에 비해 분명 큰 혜택인 건 부인할 수 없다) 받으니 시급이 얼마인지 알 필요도 없고 다행히 가족 중에도 시급을 받는 이들 없으니 무관심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교사 연수에서 그런 태도를 맵게 비판한다.

“여러분들은 안정적 직업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가족들 가운데도 아직 시급 받는 이들 없습니다. 행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교실에서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용돈 벌겠다고 혹은 갖고 싶은 물건 사겠다고 방과 후에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일합니다. 그 아이들이 제대로 최저시급이나마 받고 있다고 확신하세요? 여러분들의 제자들 아닌가요? 제자는 자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것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면 그것을 막고 그 폭력에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교실에서 가르치기만 한다고 선생님 역할 다 했다고 여기십니까? 내가 최저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어도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건 최소한 동료시민들에 대한 예의 아닙니까? 학교에서 노동의 권리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기는 합니까? 늘 의무만 가르치고 정작 권리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으면서 그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듣기 거북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 말을 하는 까닭은 그게 중요한 교육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착취와 억압이 비일비재한데 어린 것들까지 그런 야만에 휘둘리고 있다. 그걸 외면하는 건 교사 이전에 어른의 역할이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지금 청춘들이 얼마나 힘들고 지쳐있는가.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머지않아 노동력의 부족 현상을 겪게 될 것이다. 인구 과잉이었던 베이비부머 세대가 완전히 경제 활동에서 은퇴하게 되면 그건 필연이다. 아무리 자동화니 로봇이니 하는 요소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든다 해도 노동력은 분명히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당장의 호구지책이 급선무다. ‘제로옵션’ 계약(zero-option contract)이라는 게 있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이 용어가 낯설 것이다.

비정규직 일자리 혹은 아르바이트 시급의 일도 일정한 계약을 맺는다. 예를 들어 시급 얼마에 하루 몇 시간 일하는 조건 등이다. 그런데 식당의 경우 6시간 노동계약을 하면 점심 때 2시간, 저녁 때 2시간쯤이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한 시간이고 중간의 두 시간은 손님이 많지 않으니 아깝다. 그래서 중간 시간 잘라내고 4시간만 일하게 한다. 그런데 어떤 날은 점심이나 저녁 때도 손님이 없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시급만 날리게 된다. 일자리 찾는 노동력은 넘친다. 그러니 필요할 때마다 휴대전화로 연결해서 먼저 오는 사람을 쓰면 된다. 그게 바로 제로옵션 계약이다.

앞으로 우리는 대형 건물이나 식당 근처에서 휴대전화 들고 어슬렁거리는 청춘들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이미 대리기사들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곧 닥칠지도 모를 이런 새로운 현상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가? 준비는커녕 그런 개념 자체를 알지도 못하는 게 지금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것만큼 사회적 유대 즉 연대에 위험한 것은 없다. 지금은 다행히 내가 일자리를 갖고 있어도 그게 언제까지 보장될 것인가. 갈수록 치열한 노동시장일 것이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희망은 절망과 체념으로 바뀔 것이다. 그게 우리의 미래일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의무의 삶이 아니라 권리의 삶이 먼저다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의무만 강조하고 가르쳤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의무만 강조했다. 사회생활은 말할 것도 없다. 권리는 그저 선언적으로만, 문장의 한 부분으로만 배웠을 뿐 그 실천과 사회적 보장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니 평생 의무의 삶에만 충실할 뿐 정작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제 몫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그런데 노동의 권리와 법적 보장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그냥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주는 돈만 받아 생활하면 그뿐이다. 그건 인간의 삶도 인격의 인생도 아니다. 심지어 종교에서조차 외면한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지상의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천상의 것에만 힘쓰라면서 정작 착취를 일삼는 당사자들, 즉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오려고 한 뼘이라도 가까이 있으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약자는 모자라고 능력 없으며 노력도 하지 않는 낙오자 혹은 패배자일 뿐이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모진 착취와 가혹한 대우는 그에 대한 공분보다 거기에 휩쓸려서는 결코 안 되는 회피집단일 뿐이다. 혹시라도 거기에 한 발 담그게 될까봐 전전긍긍일 뿐이다. 자신들이 노동자라는 건 까맣게 잊은 채.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서는 의무만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무라는 것도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조금만 곰곰이 따져도 마땅히 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다. 복음서는 의도적으로 회피된 권리에 대해 가르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내려와 의무의 삶을 강조했을 리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과 탐욕을 질책하고 그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희망을 가르친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자체가 최고의 권리다. 그 권리가 우선했을 때 그 권리의 진정한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추구할 수 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지금 우리 교회가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구원’과 ‘하늘나라’를 핑계로 맹목과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를 강조하면서도 그 두꺼운 책에서 딱 한 번만 언급한 건 ’보이지 않는‘ 게 비과학적인 혹은 신학적 논의로 보일까 염려한 까닭이지만, 그러면서도 반드시 쓸 수밖에 없던 건 그건 마치 ’신의 섭리‘만큼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라는 의미 때문이었다.

스미스가 말하고 싶었던 건 봉건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황이면서 중상주의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 즉 왕족과 봉건 귀족들, 군주국가 체제, 부호들과 종교 권력의 비합리적 힘을 거부하고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로서 시장이 스스로 가격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즉 비합리적이고 탐욕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즉 개개인의 인격성에 이미 그 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을 깨뜨리는 것도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라는 것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른바 주류경제학(‘주류’라는 수식어도 참 웃기는 말이지만)에서 걸핏하면 ’보이지 않는 손‘을 외치는 건 자율적 인격성이 아니라 규제를 풀어서 자신들의 탐욕을 극대화하겠다는 노골적 요구에 다름이 아니다. 교회가 <국부론>을 제대로 분석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게 일종의 신학적 즉 ’신의 명령‘과도 같은 절대적 합리성이라는 점을 가르친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저 성경이나 읽고 신학적 주석에만 매달리면서 정작 ’세력‘의 확장이라는 지극히 속세적인 관심에만 몰두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소수지만 국부의 60% 이상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경제학자들을 내세워 규제를 풀어야 경제가 산다며 온갖 압력을 가하고 이미 서구에서 실패로 드러난 신자본주의를 새로운 교조로 내세우며 승자독식의 폭식을 저질렀다. 이른바 낙수효과조차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삶은 서서히 무너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오불관언이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그야말로 반 복음적인 세태에 앞장섰다. 물론 교회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과거를 미화하거나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사에서 무수히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큰 안목으로 이해하고 그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경계를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장황하다 싶을 만큼 역사적 접근을 통한 통사적 비판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그러한 인식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것은 종교 또는 신학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국 교회와 신학자들이 좁은 영역의 신학에만 갇힌 채 역사적 안목과 통찰을 키우지 못한 기형적이고 교조적인 태도만 강화한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키웠다.

갈수록 심화될 고용의 불공정 문제는 이미 1997년 체제 이후 20년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도 않은 채 소수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관변 경제학자들의 음모적 훈수에 농락당한 채 악화된 현실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제 제로옵션 계약이 일상화되는 암울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AI니 자동화기계니 하는 환경이나 턱밑에서 칼을 들이대는 제4차 산업혁명의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이미 겪고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의무만 강조하는 사회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하나인 노동의 권리에 대해서는 묵살한 채. 의무는 권리가 전제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이지 강요와 왜곡된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올바른 의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권리의 학습과 그 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

 

몬드라곤 창립자, 호세 마리아 신부

사람이 먼저다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몬드라곤은 조선업이 몰락하면서 함께 무너지고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일자리를 잃은 청년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며 무의미한 패싸움으로 시간을 때웠다. 거기에 부임한 젊은 사제 호세 마리아 신부가 작은 자전거 가게를 인수하여 두 청년에서 일자리를 주면서 시작한 몬드라곤은 지금 스페인 경제에서 7위권을 지키고 있는, 재벌 못지 않은 거대한 협동조합이 되었다.

이 조합이 특별히 세계적 관심을 이끌게 된 것은 2008년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경제위기에 고용을 줄이기는커녕 반대로 고용을 늘였고 조합은 오히려 더 상장했다. 그 조합은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혜택을 똑같이 누릴 수 있다. 또한 대표이사도 조합원들이 선정하며 다른 거대기업처럼 회장이 엄청난 급여를 받지도 않는다. 모든 조합원들은 자기 회사라는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한다. 꿈같은 일이지만 현실이다.

몬드라곤의 사훈은 ‘직장에서의 인간주의(Humanity at work)'다. 조합은 다른 어떠한 가치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실현에 우선권을 둔다. 사람이 먼저라는 뜻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국정농단에 저항하여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났을 때 “이게 나라냐?”라고 분노했다. 결국 그 적폐와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후안무치의 정권은 무너졌다. 그 실마리는 세월호사건이었다. 그들 말마따나 설령 교통사고였다 하더라도 그 이후 보여준 책임 회피와 무능을 넘어 오히려 유족을 능멸하고 조사를 훼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시민들은 실망하고 분노했다. 오죽하면 “이게 나라냐?”라도 따졌을까. 새로 뽑힌 정권이 “사람이 먼저다”라고 의제를 정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가나 사회가 의무를 강조하려면 그에 걸맞은 모범을 먼저 보여야 하고 구성원들의 권리를 완전하게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짓밟고 감시하며 조작을 일삼았다면 이미 존재 이유가 없다. 이제라도 의무 이전에 권리를 가르쳐야 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종교에서도 그래야 한다. 그것이 인간회복의 지름길이다. 특히 청년들의 불행과 그것을 악화시키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88만원 세대’의 슬픔이 극복되기는커녕 이제 ‘77만원 세대’로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청년들의 ‘인간과 삶’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최소한 인간의 염치와 예의를 지녀야 한다. 새해는 사회적 악행과 모순을 한 뼘이라도 줄일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그리고 막연하게 새해의 희망을 외치기 전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게 인간의 회복의 시작이다. 그런 새해가 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기 위해서도.

어떠한 종교를 가졌건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그런 다짐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그게 부활의 정신이다. 교회와 신자들만 변해도 세상의 절반을 바꿀 수 있다. 그런데도 하늘나라와 극락만 바라보며 현실을 외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을 바꿔보자. 그런 새해를 만들어보자.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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