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그들은 믿음의 길로 초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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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그들은 믿음의 길로 초대받았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2.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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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믿음의 여정-1

출애굽의 여정,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그 여정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떠나는 모든 사람들이 걷는 여행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인류가 의인화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일어난 것은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구속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출애굽기에서 에집트는 구속의 땅이고, 약속된 땅은 자유의 땅이었다. 에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여정은 -홍해를 건너 시나이산과 사막을 건너는 길-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가는 길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치러야 할 투쟁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해방을 경험한 우리 자신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출애굽을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로 인식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거리감이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 사건들은 아주 믿을 수 없는 거짓이거나 그 당시의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셨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중요한 사실은 그러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보았다.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력은 사실 때늦은 종교적 깨달음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돌이켜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손을 발견한다.

뒤늦은 깨달음이 선견지명이 될 때 -하느님이 과거에 하신 일들을 미래에 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감을 갖게 될 때- 이를 신앙의 통찰력이라고 한다. 이 통찰력이야말로 올바른 예배의 핵심이다. 전례에서 우리는 성서 봉독을 통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상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주님의 현존을 본다. 이와 매우 비슷하게 출애굽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미 성문화되기 이전부터 전례상에서 계속 구전되어 왔다. 그 이야기는 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출애굽 15,1-21을 보라).

출애굽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회개를 했을 때나,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을 때 뿐이다. 당신이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 이야기를 당신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의 경험을 자신의 것과 일치시킬 수 있게 된다. 성령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영성적인 문제에 눈을 뜰 수 있다. 반면, 당신이 종교라고 하는 사회적인 놀이나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 놀이를 하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회개의 순간 없이 또 회개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가 그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눈은 있으나 알아보지 못한다. 귀가 있으나 듣지를 못한다”(마르코 8,18). 성서의 지혜를 얻기 위해 우리는 성령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향하고 우리 믿음의 여행을 그 분께서 인도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 안에서 기꺼이 출애굽의 사건을 겪어야 하며, 주님께서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몸으로,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그 둘 사이에 사막이 펼쳐져 있음을 자각하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해야 한다.

히브리인들이 실제로 에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으로 탈출한 원래의 출애굽 경험은 기원전 2000년과 1200년 사이에 일어났다. 우리는 그 정확한 시기를 알지 못한다. 피난 나온 사람들이 친척간이었는지, 그들이 정말 한 “민족”이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성서학자들은 그들이 같은 노예 생활을 했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은 것, 그들에게 공동의 신원을 제공한 경험이 바로 출애굽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믿음에 이끌려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다.

 

모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에집트인은 아니었지만 교육을 잘 받고 이집트 내에서도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출애굽의 초반에는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누군가 노예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여 모래에 파 묻었다. 탄로가 나자 그는 도망쳤다. 몇 년 후에 그는 소위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에집트로 돌아가 억눌린 사람들과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어떤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 분의 말씀을 듣게 하신 후, 그로 하여금 하느님 백성을 믿음의 여행으로 이끌도록 하신다. 알려진 대로 모세는 언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더듬거렸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님은 적합하지 않은 듯한 사람을 그 분의 도구로 선택하시곤 했다. 그 분은 보잘것없는 사람을, 멸시받는 사람들을 (고린토I서 1,28) 택하셔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게 하셨다. 그들은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초기의 모세는 말을 더듬는 도망자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세를 선택하셨다. 모세가 하느님과 만나는 사건은 불붙는 떨기의 이야기에 상징적으로 나와 있다. 하느님은 빛을 발하며 살아 계셨고, 불은 형상 안에 감싸여 있으며, 그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출애급 3,1ff). 당신을 드러내신 후, 하느님은 그를 위해 준비하신 사명을 모세에게 건네신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건져내어라” (출애굽 3,10).

이때 모세는 머뭇거리며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고 하느님께 묻는다. 주님은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출애굽 3,12)라고 대답하신다. 주님은 모세에게 방법을 일러 주시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 어떤 이정표나 계획표 역시 주시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방법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하느님은 그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실 뿐 그것이 전부다. 하느님은 사실상 “내가 하겠다.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뿐이다. 모세의 힘은 하느님의 현존이요, 지침은 그가 여행을 시작하면서 주어진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지날 때 다시 한번 사실로 드러날 것이고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것은 모험과 실천의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많은 종교가 그러듯 신비화되고 자기-방어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모험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약속 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믿고 행동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 역사란 약속과 그 약속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기간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약속에 의지하며, 귀 기울이고, 기다리며, 희망을 갖고 신뢰하면서 행동한다. 이것은 엄청난 자기 수양으로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마태오 7,14). 그것은 믿음의 길이다.

 

이 약속을 바탕으로 모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여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 낼 것이라는 말 또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그들과 같이 기도하여, 마침내 백성은 그를 믿게 되었다: “백성들은 믿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시어 자신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살펴주셨다는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경배 드렸다”(출애굽 4,31).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고전적인 응답 방식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처음 들었을 때 우린 그걸 믿지 않는다; 후에 그것을 믿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끝난 것 같이 여긴다. 그 비전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폭포수 같은 힘을 얻는다. 아무것도 우리의 길을 막을 수 없고 어떤 것도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파라오의 돌 같은 마음과 안정을 추구하는 제도가 바로 그 장애물이다. 그러나 모세는 기존의 악을 하느님의 힘과 저항으로 대응한다. 출애굽 7-14장에서 우리는 야훼가 에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볼 수 있다. 그 중의 마지막 재앙이 파라오의 마음을 바꾸어 히브리인들을 풀어 주게 된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그 재앙이 자연재해를 두고 생겨난 이야기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나일강이 매년 범람해서 홍수가 날 때마다 온 나라는 개구리로 뒤덮히곤 했다. 물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는 것과 다른 재앙들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하느님은 이런 사건을 통해 히브리인들을 에집트에서 꺼내 오시려 하셨다. 이 이야기들은 사건 발생 수백년 후 입에 입을 통해 내려오면서 과장되고 미화되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고대의 가장 강력한 제국의 노예들이 해방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 시키셨다. 이것 자체가 기적이다.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 사건의 불가사의한 면을 뒷받침하고 있다.

양쪽에 물의 장벽이 쌓여 그 사이를 사람들이 건넜다는 홍해의 이야기도 이와 같이 이해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쓰여진 대로 일어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일어났었을 수도 있으나 우리의 신앙은 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발생했었다는 것에 근거를 두지는 않는다. 그런 믿음은 근본주의적인 믿음으로, 인격체에 대한 믿음이라기 보다 문자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의 믿음은 주님 안에 있었고 우리 또한 그러하다.

그분께서 구원하신다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홍해 북부의 습지 지역인 갈대강을 건넜다고 한다. 탈출한 노예들은 걸어서 그 곳을 지날 수 있었지만 무거운 마차를 탄 에집트인들은 진흙 속에 빠졌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히브리인들이 바다건 습지건 그 어떤 것이건 간에 반대편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에집트인들은 그 한가운데 갇혀 버렸다. 히브리인들은 이 기적 같은 탈출을 야훼께서 인도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대대로 전승되어 오면서 부풀려지고 양쪽 물기둥의 높이가 20피트에 이르렀다고 전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고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 삶의 곳곳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음을 믿는다. 성서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며 그 나머지는 미화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야말로 영원한 진실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해방시켜 주신다(우리가 기대하는 것 보다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종종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가끔 몇 년이 지나 되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그 시간을 겪는 동안은 그런 일들이 별것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알게 되고, 우리 삶 속에서 그 분의 영광과 아름다운 사랑을 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있을 때는 그것이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주 평범해 보일지 모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얘기 할 수가 없다. 신앙의 길은 확신의 길이 아니다.

나는 모세가 가끔 흔들렸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이 진실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지 아니면 자신이 아주 거창하고 이기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 하고 망설였을 것이다. 만일 모세가 자신이 분명 옳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환시나 환청을 경험했다면 모세의 길은 믿음의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길로 초대받았다. 한걸음 한걸음 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믿고, 순종하고 우리의 삶을 그 분의 손안에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신다. 그것은 마치 아주 캄캄한 방안에서 무엇에 부딪힐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앞길이 환하게 비춰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고 싶어한다. 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의탁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확실한 것을 원하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 분께 의탁하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 지위, 또는 돈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다. 어둠 안에서 우리를 지켜 줄 안전 장치는 모두 사라졌다. 어둠, 사막은 자신을 하느님께 송두리째 맡기는 법을 배우는 장소이다. 승복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인 셈이다.

우리는 종종 고통 한가운데에서 가장 순수한 신앙을 경험한다. 초심자들의 경우 이따금씩 자신들이 그 분을 위해 고통을 받는다고, 자기가 영광스러운 순교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것은 전혀 영광스럽게 느껴지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는데, 이런 무의미함이 바로 고통의 핵심인 것이다. 사막 경험의 정수는 당신이 거기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데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 체험에서 어떤 귀감을 발견할 수만 있어도 그것은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신이 사막 체험에서 어떤 목표를 찾을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어떤 모범이나 목표를 찾을 수 없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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