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 누가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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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 누가 시작할 것인가?
  • 한상봉
  • 승인 2017.12.2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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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무리하면서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일각’에서나마 종교개혁선언을 시도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을 테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어렵다’라는 말이 가진 함의를 생각하면 기성 종교권력이 가진 막강한 물리력과 영향력이 막대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 대다수 신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종교권력의 문제만을 탓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신자들이 종교를 떠나야 한다”는 식의 ‘탈출기’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종교개혁을 위해 종교에서 탈출하라는 말은 흔히 “나, 교회 졸업했어.”라는 자조적 발언으로 드러나곤 했다. 개신교에선 ‘가나안성도’라는 말까지 나온다. 거꾸로 하면 ‘(교회) 안 나가’는 신도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개혁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묻게 된다. 일본 상지대 신학교수였던 네메세키가 지은 <하느님을 찾아서>(분도출판사, 1975)에서는 가톨릭교회 안에 보이는 다섯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희망을 갖기 위하여’란 부제가 붙은 만큼 ‘그래도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싶다는’ 절실함이 배어나온다.

3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사실상 그 사이에 바오로 6세 교황에서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등 교황이 네 번이나 바뀌면서 특히 한국천주교회는 이념적으로는 사정이 나아진 측면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한스큉의 저작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예전에는 줄곧 교회비판의 과녁이 ‘교황주의’였는데, 지금은 교황이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교회를 방문해 주교들에게 번영하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교회에서 내치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어야 했다. 어차피 교회개혁이든 뭐든 사람이 하는 것이니 네메세키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신자들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개혁 누가 시작할 것인가?

(1) 보수적 그리스도인(conservative Christian):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방침이 지나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로서, 공의회 이전 상태로 교회를 복귀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개혁사상 때문에 교회가 개신교와 비슷해졌으며, 가톨릭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현대적 사상 조류를 불온시하며, 교회는 절대불변의 영원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며, 다른 새로운 경향에 관심을 갖는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취급한다. 네메세키는 이들에게는 ‘장래성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이런 신자들은 공동선을 위한 사회교리에 관심이 없으며, 자기 신앙을 문제 삼지 않는다. 성직자들의 일방적 지도에 순응하면서 교회의 성직자-남성 권위주의에 살을 붙여주고, 교회 상업주의에 뼈를 발라준다. 이들은 소박하게 일상의 자잘한 행복을 추구하며 때로 구복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때로 작은 봉사에 기뻐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에 만족한다. 이들에게 교회란 그저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는 곳이면 족할 따름이어서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일부 사제와 신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사랑'이라는 말에 진저리를 친다. 아마 이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갈등을 부추기는 불편한 교황일 것이다.

(2) 진보적 그리스도인(progressive Christian):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공의회를 교회개혁의 출발점으로 하여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개혁을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한다. 계속 연구하고 대화를 시도하며, 고위성직자들을 설득시켜 교회당국의 승인을 얻은 방법으로 교회개혁을 이루고자한다. 네메세키는 가톨릭교회의 변화는 이들의 생각, 노력, 용기, 성령의 인도하심에 달려 있다고 본다.

역설적으로 이런 진보적 그리스도인의 전형이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로 보인다. 교황은 ‘관료적 성직주의의 폐해’를 주기적으로 경고하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고, 결국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일부 주교들이 교황의 노선에 적극 동참하고 있으며,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노선에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교황청이 보수적 노선을 견지할 때는 그리도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악평을 듣던 한국교회가 비교적 진보적 노선을 선택한 교황청의 흐름에는 마치 ‘선택적 수용’을 행하는 심사숙고형 교회로 바뀐 모습이다. 교회개혁이라는 약은 특별히 교회권력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요청이기에 입에 쓴 약일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교회는 복음적 활력뿐 아니라 교회생활 자체의 활력이 급격히 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약 먹기는 거부하면, 결국 나중에는 수술대에 올라야 치유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 그리스도인은 ‘적절한 자가치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급진적 그리스도인(radical Christian):

교회의 공식단체 든 비공식 단체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회사목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모두 포괄되어 있는데, 국가권력의 박해에 직면하거나 교회권력의 압력을 느끼며 활동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어느 주교가 사회사목 담당신부에게 “사회교리는 가르치지만 현장에는 나가지 마라”고 못을 박을 때, 그 사제는 혼란을 일으키거나 장상의 요청을 부담을 느끼면서도 무시할 수밖에 없다. 고통 받는 현장의 요청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제의 경우에는 교구에서 제대로 인사발령을 받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 ‘사제로 산다는 것이 뭐지?’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현장을 직접 보면서 투신하는 사제들은 복음과 현실 사이에서 늘 긴장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이들은 교회가 더 급진적으로 변화되길 요청한다. 그러나 자신의 사목 권한이 주교에게 달려 있다는 현실 때문에, 교회비판은 술자리에서 등장할 뿐, 공식 담론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때 그나마 실력행사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의식있는 평신도’뿐이다. 사제들은 예언자적 비판의 칼날이 세상을 향할 때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그 칼날이 교회로 향할 때는 ‘현실적으로’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의로운 분노’는 곧 ‘사제 신상의 주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소 영향력이나 상징성에서 낮은 수준이겠지만, 급진적 평신도들은 자유롭게 발언하고, 때로 교구청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중세기가 아니라서) 이들에게 ‘파문’을 남발할 수 없는 변화된 교회상황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들이 바라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이며, 복음대로 생명을 걸고 실천하면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다. 제도교회의 관행에 저항하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제도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이다.

(4) 개인적 그리스도인(individual Christian):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 교회의 제도와 활동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지만, 교회가 복음적 영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이라고 여기는 전례적 삶을 포기한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벗인 그리스도와 멀어진 교회는 부자들과 자본주의에 타협하고 있다고 보며, 성사(聖事)마저 형식적 부담으로 느낀다.

그들은 자기가 교회조직과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교회개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교회개혁에 대한 의욕을 아예 접어둔 채, 자신의 삶 안에서 독립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를 떠난 이들을 ‘냉담자’로 적시하는 행위를 가장 싫어한다. 스스로 복음적 심장은 여전히 뜨겁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쉬는 신자’라고 말해도 싫어한다. 이들은 전례생활을 당분간 쉬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전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교회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형식은 접고 신앙의 요체만 가져가겠다고 생각하는 '전선에서 후퇴하는 그리스도인'이다. 

(5) 지하(독립)교회 그리스도인(underground/independent Christian):

교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나 성사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존 교회에 나가는 대신에, 자기들만의 신앙공동체를 세우는데 열정을 쏟는다.

그들은 제도교회의 본당구조 등 공적 조직과 상관없이 특정 사제를 초청해 성찬례를 행하고, 공동으로 기도하며, 대화나 토론방식으로 성서를 연구하고, 복음정신에 따라서 공동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모임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친교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현대세계에 적합한 생활방식이라고 믿는다. 이런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은 인터넷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공간적 거리가 해소됨으로써, 구역 중심의 본당체제에 매이지 않는 신앙공동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첫 번째 유형(보수적 그리스도인)은 교회개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네번째 유형(개인적 그리스도인)은 신앙공동체와 단절되어 있으므로 교회개혁을 위한 의미있는 역할에서 배제된다. 다섯번째 유형(독립적 그리스도인)은 자칫 교회분열을 야기할 수 있지만, 교회개혁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당/교구 구조에서 벗어나면 자족적 공동체로 남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 네메세키 교수는 세 번째 유형의 예언자적 행동에서 자극을 받아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할 때 교회개혁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본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교회개혁을 위한 적절한 시기를 살고 있다. 교황청이 지금처럼 급진적 견해를 지닌 적이 없으며, 한국교회 자체가 지금처럼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시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뜻있는 신자들이 다시 교회구조 안으로 들어가 '안으로부터 쇄신하는 누룩'이 될 필요가 있다. 다만 어려운 점은 그만한 일을 해낼 만큰 훈련된 평신도 일꾼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한편에선 평신도 리더십을 양성하고, 한편에선 본당/교구 구조 안에서 대중운동을 전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광화문에 모여 미사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 개혁은 적폐 청산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적폐청산’이다. 그러나 교회 구조와 관행을 두고 한마디로 ‘적폐’이기 때문에 마치 숙청하듯이 도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구조와 관행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각 시기마다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조와 관행이 우리시대의 요청의 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합리적 토론과 절차를 통해서 개선해 갈 때 교회 공동체 안에 여전히 공동체 구성원들으로 남아 있고, 또한 남아 있을 ‘믿음이 약한 이들’을 안고 갈 수 있다.

교회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쉽게 놓쳐버릴 수 있는 이야기는 교회가 ‘순결한 창녀’라는 점이다. 기성교회는 줄곧 ‘교회의 순결(거룩함)’만을 강조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을 단죄해 왔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매춘(세속성)’만을 강조하는 것도 위험하다. 교회 안에서 “목소리가 큰 게 장땡”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한다고 교회가 바뀌지 않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개혁은 전쟁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당국과의 부드럽고 끈질긴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교회 안에 지금처럼 내일도 수없이 많을 것이며, 이들 모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섭리하신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진보적 가톨릭신자들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줄곧 비판해 왔다. 그가 해방신학을 단죄했던 신앙교리성 장관 조세프 라칭거 추기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교회법에서 보장한 종신교황으로 남지 않고 갑자기 사임함으로써, 가장 개혁적인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가톨릭교회는 얻었다. 그 길이 어렵다고 해서 ‘설득’을 포기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마저 강조하고 있는 ‘성직자 권위주의’는 마치 ‘적폐’처럼 이야기되지만, 사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까놓고 말해서) 성직자들의 권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주교와 사제들 앞에서야 어떻게 처신하는지 모르지만, 성직자들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겸손하게 수용하려 드는 신자들은 많지 않다.

교회법상 주교는 교구 안에서 ‘통치권자’이지만, 그걸 실감하는 이들은 교구 사제들뿐이다. 평신도들은 사실상 주교를 통치권자라기보다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본당에서 사제들의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일뿐 강제력이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성직자 권위주의가 강력했던 1970~80년대에, 이른바 ‘운동권 사제’들은 담당형사들이 하나씩 붙어 다녀야 할 만큼 막강했다. 사제 한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교구 전체가 시끄러워지고, 주교 한 사람이 구속되면서 만들어진 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본당신부가 시국기도회에 나가면 신자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따라 다녔다. 항시 순기능과 역기능은 동시에 존재했다.

설득의 길을 가야 내 언어가 얼마나 명료하고 복음적인지 수시로 점검할 수 있다. 교회개혁의 길이 자칫 배제와 차별의 길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하며, 그 길에서 신앙이 약한 이들의 마음을 보살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적폐라기보다)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한국교회 안에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나 <가톨릭프레스>와 같은 공식교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매체들이 생겨나서 도움이 되고 있다.

여기서 ‘적폐’란 말을 피하고 싶은 이유는 ‘적폐’가 ‘누적된 폐단’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적들의 폐단’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사뭇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적’(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도 진보적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 해치워 버려야 할 원수는 아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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