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확산방지체제(NPT)는 1960년대에 구축되었고 오늘날에도 핵무기 보유의 기본 규범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핵확산방지체제의 근본 전망은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이 핵무기 보유를 포기함은 물론 핵보유국들도 점차 핵 군축을 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계 핵무기 체제는 근본적으로 현상에 안주(安住)하는 윤리를 수용하였습니다.
거대 핵보유국들은 여전히 핵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무기를 현대화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핵무기들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핵 억지 정책도 현상에 안주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이것이 국제 관계를 안정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는 방편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핵 체제를 거부한다
안주(安住) 윤리와 대조적으로 핵무기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현행 핵 체제와 핵 억지 윤리를 거부합니다.
핵 시대 내내 가톨릭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류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의무와 함께 핵무기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변함없이 확고하게 지적해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 받아야 한다.”(기쁨과 희망, 80항)
그래서 지난 70년 동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차원에서 완전한 핵 군축을 도덕적 당위(當爲)로 삼는데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이러한 대량 살상과 무차별적 대량 학살 무기의 존재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 질서 확립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핵무기 보유가 이미 현실이 된 세계에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강력한 실재에 뿌리를 둔 도덕적 정당화 윤리로 축소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도덕적 가르침은 단지 우리가 바라는 세계에 뿌리를 둔 윤리가 아니라 언제나 현존 세계 현실에 뿌리를 두는 윤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특히 냉전 기간에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시기에 평화를 위해 간과했던 안정을 유지하고,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핵무기 보유와 이의 사용 위협에 도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보장은 교회 안의 깊은 회의적 태도, 즉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가톨릭 가르침의 구체적이고 구속력 있는 요소들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표적(標的) 선정, 고의성, 전략, 그리고 군사구조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들을 회의적으로 보는 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도덕적 보장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력이 절대 도덕적으로 정적(靜的)인 실재여서는 안 되고, 핵 철폐로 나아가는 비상 임시 실재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유엔특별군축회의에 전한 메시지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현 상황에서, 균형에 기반을 둔 억지력이 분명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점진적 군축을 위한 단계라면, 이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폭발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이 최소한의 장치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베네딕토 교황, "핵무기 폐기에 관한 협상을 추진하라"
냉전 종식은 핵 초강대국과 국제 공동체가 근본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지속적이고 단계적으로 보편적인 핵군축을 향한 진보적 시도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초강대국들의 핵 감축과 신흥 핵보유 국가들로 확산되는 시기에 이어 참된 진보의 시기를 맞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008년 베네딕토 교황은 세계의 핵 전망을 살펴보고 나서, 안주의 윤리와 제한적으로 핵 확장을 허용하는 것은 억지(抑止) 윤리와 밀접하게 관련돼있고, 그 결과 핵무기 보유가 강대국 위치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었으며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들도 자국의 이익과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에 애통해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모든 선의의 사람이 단결하여 특히 핵무기 분야에서 실질적인 비무장화를 위한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핵 확산 금지의 과정에 아무 진전이 없는 이 상황에서, 저는 책임자들이 더욱더 확고한 결심으로 발전적이고 상호 합의된 기존 핵무기 폐기에 관한 협상을 추진하도록 강력히 당부합니다. 저는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이의 바람을 담아 이렇게 호소합니다.”(제4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유엔군축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 베네딕토 교황의 뜻을 계속 이어가며 핵 군축 윤리와 핵 억지 윤리가 근본적으로 상반된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핵무기의 존재에 대해 고심하면서 세계가 직면한 현 상황이 냉전 현실과 크게 달라졌고, 억지력이 안정적인 핵 세계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핵 억지 전략에 의존하는 것은 핵 억지력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보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전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다극화된 세계에서 핵 억지 개념이 안정적인 힘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국가들이 확산 금지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현재 목도하는 현실입니다.
핵 억지력 윤리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
이 두 상황을 고려하면 냉전 종식 이후 핵 세계질서에 나타난 변화는 오래 지속돼온 억지력 윤리의 도덕적 근거들이 체계적으로 붕괴돼온 셈입니다. 지배적인 핵보유국들이 상당량의 핵무기 감축 이행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핵무기 폐기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을 여러 국가 공동체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따금 지정학적인 이유들로 새 핵보유국을 용인하는 것은 핵확산 금지 조약을 위반하는 일이자, 일치와 발전을 저해하는 이중 잣대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전개 과정에 밀려 핵 억지력의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간파하였습니다. 엄청난 핵 위협이 지역 강국의 행동에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지구적 차원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를 갈망하는 테러리스트와 반란자들의 행동에서 훨씬 더 섬뜩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억지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핵무기 배치를 위해 목표물과 과정들을 설정하는 것을 둘러싼 의도의 윤리 문제에 비추어 교회는 억지력의 도덕적 정당성을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해보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도록 용납하는 도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의 가르침은 억지력 윤리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유엔 총회에 보낸 성명서에서 이를 아주 분명히 밝혔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은 일단 포기하더라도 안보 체계인 핵 억지력은 신중하게 서서히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적은 규모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쌍방의 변화들을 통해 가야 한다면서 현재의 불안정한 핵 환경을 용인하는 것이 현실적입니까? 핵의 불안정성을 조장하는 조건들을 계속 무시해야겠습니까? 게다가 핵보유국과 비 보유국 간의 불균형이 핵 확산 금지 체제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현실적입니까?”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집단 안전 보장은 억지력 체제에 있지 않고 오히려 집단 안전 보장이 핵무기 폐기를 위한 활동적이고 포괄적인 움직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도덕적 지정학적 현실을 폭넓게 수용하는데 있다는 것을 세계가 깨닫기를 요청합니다.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평화는 전쟁의 기술적 수단에만 편협하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윤리들을 만드는 수단적인 신중함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평화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에 뿌리를 둔 건설적인 윤리, 곧 수단과 목적이 밀접하게 일치하는 윤리로 평화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무력 사용을 분별하고 제한할 수 있는 윤리가 필요합니다.”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가톨릭의 가르침은, 집단 안전 보장을 향한 길은 그동안 위축돼왔고 포기해왔던 그리고 핵 억지력 시대에는 위선적이라 간주되었던 확산 방지체제의 본래 구조를 구성하는 바로 그 요소들에 있다고 말합니다. 핵무기 재앙을 제거하면 세계 모든 국가에 공동의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입니다. 핵보유국과 비 보유국 모두가 계속해서 핵 군축을 실질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핵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온 인류 공동체의 구조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인식이자, 또한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 군축을 철저히 수용하는 데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인식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며 인류 공동선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대 핵보유국들도 세계 무기통제 체제의 근본 윤리를 거부하는 안주의 태도로 이러한 무기 체계를 온존시키고, 심지어 현대화하면서 인류 공동선을 위협하는 현실 탓에 평화 건설이라는 우리의 목표 실현의 길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핵 문제에서 진척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은 재래식 무기 경쟁으로 큰 방해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경쟁 탓에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재앙에 가까운 인류 절멸의 유령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는 이러한 대결의 순간에 부정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한 국가에만 군비 축소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도덕적 근거는 없습니다. 모든 핵보유국은 상당 수준의 핵무기 감축과, 억지력 윤리의 포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국제 공동선을 함께 증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단계의 확인을 향한 실질적인 과정을 빠르게 진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한 회개의 요청
우리는 전쟁과 평화, 그리고 한반도와 전 세계가 직면한 국제 정체성과 화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과 교도권의 가르침은 이러한 노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큰 은총입니다. 특히 가톨릭의 가르침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가르침, 국제 공동선 윤리, 핵무기와 핵 억지력에 대한 가르침이 모두 포함될 때 이 대화를 수행하는 강력한 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위한 이러한 대화를 위하여 우리 각자는 흔히 불일치와 심지어 조롱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면서 각자가 속한 사회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증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국가의 교회는 복음과 신앙의 필요성에 비추어 세계 평화와 우리 인류의 미래에 관한 근본 문제들에 관해 교회 스스로 새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임무들 가운데 하나는 당연히 대화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와 국가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이 회개하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로버트 W. 맥 엘로이 주교
미국 샌디에고교구 교구장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