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아홉가지 계명을 지키고 첫계명만 거절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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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아홉가지 계명을 지키고 첫계명만 거절한 청년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7.12.21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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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마을 공동체 - 3

마르 10,17-22의 본문은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본문의 문학적 구조는 상황묘사(17ㄱ절), 대화(17ㄴ-20절), 부르심(21절), 결과(22절)로 구성되어 있다.

17절은 독립 소유격으로 표현된 예수의 동작으로 시작한다. 그때 새로운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한다. 이 동작들은 예수님을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달리다” 동사는 마르 5,6; 9,15에도 나오고, “무릎을 꿇다”는 마르 1,40. 5,6.22.33; 7,25에도 나온다.

우리 본문의 상황묘사에서 소개된 어떤 사람은 전형적인 작은 등장인물이다. 예수에 대한 그의 첫 동작들은 높은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에 대한 첫 소개는 긍정적이다. 그는 신체적인 결함을 가졌거나 그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먼저 그는 예수를 “선하신 스승님”이라 부른다. 여기서 질문자는 예수의 정체와 선함의 본질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예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는 먼저 선함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에 도전한다. 왜냐하면 질문자의 말은 율법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는 아무도 하느님 외에는 선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선함이 인간적인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만이 그 선함의 참된 규범이고 원천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19절에서 예수는 십계명의 후반부를 요약하면서 하느님의 명령을 회상시키신다. 이것은 질문자의 관심을 하느님에게로 이끄는 것이다.

사진=Heinrich Hofmann (1824–1911)

그러자 그는 20절에서 예수를 “선하신”이라는 형용사 없이 단지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십계명의 명령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21절에서 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사랑도 그에 대한 요구를 면제시키지는 않는다. 예수는 그에게 부족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뒤따르기를 명령한다. 마르 1,18.20; 2,14; 8,34에서처럼 “예수를 뒤따르기”는 버리기를 전제한다. 특히 8,34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 뿐 아니라 더 넓은 범위인 군중에게 당신을 뒤따르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부정적인 응답이 22절에 표현된다. 우리 본문의 어떤 부자는 “예수를 뒤따르기”를 거절한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는데,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복음서의 이야기꾼은 설명한다. 이 부자는 하느님 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십계명의 후반부를 잘 지켰으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자리에 두는 것을 금하는 첫째 계명을 오히려 무시한다.

사실 “예수를 뒤따르기”에로의 부르심은 부자에게는 회개의 요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는 예수의 부르심과 요구에 부정적인 응답을 한다. 이 부자의 태도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중에서 마르 4,7.18-19에 언급되는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를 연상케 한다. 이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이다.

이와 같이 우리 본문의 어떤 부자는 예수에게 존경을 표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사람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계명 실천에 헌신한다. 그는 계명에 순종적이지만 선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선함은 인간적인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홀로 선함의 원천이고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예수의 명령에 불순종한다. 그는 하느님보다는 자신과 소유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집착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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