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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 답을 청하며 다시 시작한다

[유수선의 복음의 힘 -9]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선물처럼 주어지는 대림절이다. 지난 2017년도, 내 영혼에 파문을 일으킨 성경말씀들을 붙들고 기도하며, 그 분의 뜻이라 여겨지는 일들을 선택하며, 지내왔다. 허나 그 결과는 많이 아팠고 때로는 화도 났으며 동시에 몹시 미안하였다.

예수님께서도 큰 결정을 앞두고 늘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지만 세상의 눈으로는 그 결과가 좋지 만은 않았다. 고향에서는 배척을 당했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했으며, 기득권 종교 집단을 피해 도망 다니셔야 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고 따른 선택들은 사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그 진위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마음의 길을 따라 지칠 대로 걷다가 대림 제1주의 독서처럼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고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저희 아버지시고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간절한 맘으로 기도를 드린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기에, 한 해의 시작에 또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시고 하늘을 찢고 내려오소서. 굽어보시며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시고 메마른 넋을 적셔 주시어 다시 보게 해주소서. 저희의 영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저 혼자만 치유되고 눈을 뜬다고 당신의 길을 따라갈 수 없사오니 저 뿐만 아니라 저와 관련된, 아니 저의 죄악으로 상처받은 모든 이의 영육을 새롭게 해주시고 구렁에서 건져내시어 평화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께서 빚으신 이들을 두시려고 손수 꾸며주신 에덴(창세2,8)으로 돌아가 당신이 마련하신 협력자들과 함께 에덴의 흙을 일굴 수 있도록 저도 새롭게 빚어주소서.”

2017년 대림절, 특별히 많은 일을 접고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이 유다의 직책을 넘겨받을 사도를 뽑는 중차대한 일을 결정할 때, 훌륭한 이들의 의견이나 제자들 다수의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를 뽑아 주시길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선택한다. 구약에서도 판관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린 미디안족과 아멜렉족과의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을 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양털뭉치를 사용해 주님의 뜻을 묻는다.

 

사진=한상봉

얼마 전에 경전공부 시간에 주역의 점 치는 자세에 대해 듣게 되었다. 원래 주역의 점은 개인의 길화흉복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관련된 사람들, 특별히 임금, 문관, 무관들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지금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을 때 천지신명께 뜻을 묻기 위해 행한 정숙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전투 전에 점을 쳤다고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에 고한다면 필시 그 답을 준다고 믿었기에 점을 쳤고, 그 결과대로 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점의 결과를 하늘의 뜻이라 믿었기에 전투에 나갔고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원래 점을 치는 행위는 하늘의 뜻을 구하는 일종의 기도행위였던 것이다. 사실 어디서고 인간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분께 ‘그 뜻과 길’을 물으며 겸허히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태도는 그 행동이 점을 치든, 제비를 뽑든지 거룩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지금 힘이 약한 이들 편에 서서 조금이라도 저울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약한 자를 돕는 일을 선택할 뿐이다. 모든 것을 합하여 공동선을 이루시는 그 분께서 정의를 이루어 주시길 청한다. 내가 혹여 잘못 판단하여 당신의 길을 벗어나더라도 돌아가도록 도와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면 그분은 나를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고 높고 좋은 지름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 

‘오늘 지금’ 그 분의 뜻이라고 믿는 일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이다. 구유에 뉘인 연약하고 아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청년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는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공연히 힘을 빼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야 어쩌겠는가? 무질서한 애착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일어나는 일인 것을.

 

유수선 수산나 
초원장학회 이사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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