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단죄할 수 있는 투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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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단죄할 수 있는 투쟁은 없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2.1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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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어떤 제자들이 포에만 원장을 만나러 와서 말했다: “형제들이 기도시간에 조는 것을 볼 때 그들이 깨어 있도록 꼬집어야 합니까?” 그러자 원장이 그들에게 말했다: “실제로 어느 형제가 조는 것을 보면 나는 무릎에 그의 머리를 대게 하고 쉬도록 할 것이오.”

이해와 연민은 수도적 삶의 방식의 기반이다. 이해가 없다면 나그네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발전하리라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가 없다. 베네딕도회의 규칙은 이러한 개념으로 가득하다. 즉 수도자들은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장상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이다.

여기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장상들의 요구들을 맞추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문지기 수도자는 어떤 때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님들을 친절하게 환영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우리는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규칙이 허락하는 것 그 이상을 필요로 하는 수도자들에게는 그것이 주어져야 하며 아무런 질문도 할 필요가 없다.

규칙보다 사람이 늘 더 중요하다. 식사 때 당번들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먹어야 하며 그렇게 하여 그들의 소임이 필요 이상으로 힘들지 않아야 한다. 아무도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약속한 삶을 사는데 실패한 수도자들은 수정되어야 함도 물론이지만 충고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잘못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모든 삶은 단계들의 연속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조건의 한계들을 알고 있는 것이 규칙이며, 규칙은 그 한계들을 존중한다.

삶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은 완전해질 수가 없다. 오로지 이해, 연민(나머지 인류와 함께 삶을 견딜 수 있는 능력, 그 인내가 어떠한 부담과 짐을 가져온다 해도)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한다. 종교라는 명목으로 연민의 이러한 개념이 상실 될 때에, 선이라는 명목으로 이 개념이 잊혀질 때에 종교는 왜곡되고 덕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느님은 연민이 깊은 존재이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신다. 다른 이를 위하여 덜 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관상적이 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생명과 진정으로 만날 수 없고 하느님의 영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관상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함과 만나게 되는 거울이다. 그렇다, 그러나 관상은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의 작음의 크기와 우리의 위대함의 잠재력을 동시에 알아 볼 수 있는 여과지이다. 관상가는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완전함을 추구한다. 관상가는 부서짐을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상가는 개인적인 필요의 시점에서 하느님이 우리 안의 부서짐을 채우기 위하여 오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상가는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충만함을 갈구하는 우리의 분명한 요구임을 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며 실제의 것을 병적으로 대체하는 것 이상의 심각한 과오이다. 모든 곳에,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의식으로 채워지는 관상, 하느님 안의 몰입이 참다운 것일 때 우리는 사랑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 밑에 있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계시리라고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에 계시며,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모든 것은 완전하게 평온해진다: 즉 우리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규율이란 없다. 용서하기에 너무 큰 죄란 없다. 직면해서는 안 될 요구도 없다. 내가 정당하게 무심할 수 있는 고통이란 있을 수가 없다. 내가 단죄할 수 있는 투쟁은 없다. 내가 견디어내야 할 의무가 없는 고통이란 없다.

하느님은 이해하신다. 그리고 따라서 참다운 관상가도 이해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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