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주변-밖의 존재와 예수
상태바
아래-주변-밖의 존재와 예수
  • 한상봉
  • 승인 2017.12.11 1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7회 사회교리주간(2017.12.10) 기념 세미나 발제문

[제7회 사회교리주간(2017.12.10) 기념 세미나 한상봉 발제문]

민족들의 발전

<민족들의 발전>(바오로 6세, 1967) 66항에서는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며 “인간사회는 중병을 앓고 있다”면서 “병의 원인은 자연자원이 감소되었고, 그나마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한 데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간의 형제적 사랑의 유대가 끊어진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이러한 형제적 사랑의 유대가 끊어진 원인을 불공정한 에너지 배분으로 인한 사회적 불균형, 경제적 민주화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불균형에서 찾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제게 맡겨진 주제처럼, 수도권 VS 지방, 남자 VS 여자, 기성세대 VS 청년 세대 등의 갈등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불균형에서 찾으려고 한다.

‘불균형’이라는 말은 자칫 가치중립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불균형’을 ‘불평등’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겠다. <민족들의 발전> 회칙이 발표된 시기는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극심하고, 중남미와 아시아 등 제3세계에서 군사정권이 출현해서 민주주의가 압살당하고, 그 결과 권력과 재화의 불평등을 개선해 보려는 해방운동이 발생하고, 특히 유럽에서는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6.8혁명이, 중남미에서는 제국주의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신학적 테제로서 해방신학이 태동하던 역동적인 시절이었다.

불균형 또는 불평등한 구조를 두고,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위-아래’ 구조이다.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에 의해 희생자가 된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요구되는 사회구조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억압과 해방’이다.

두 번째는 ‘중심-주변’ 구조이다. 선택받은 소수가 대다수 민중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현상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차별과 배제(소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경제 성장의 ‘낙수효과’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분배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이들이 늘어나고 양극화가 심해진다. 교육과정에서는 공교육이 방치-해체되고 특목고 등 선택받은 소수에게 교육적 투자가 집중되는 현상이다.

세 번째는 ‘안-밖’ 구조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규직-비정규 노동자의 형편이다. ‘아래-주변’으로 내몰린 민중 가운데서 ‘안-밖’을 구분해서 분리시킴으로써 갈등이 민중 ‘사이’에서 발생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중심-주변’을 강화하는 교육 불균형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정유라의 “돈도 능력이다”라는 발언은 한국사회의 교육현실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유라의 발언이 국민들의 격심한 반발을 불러온 것은 불쾌하지만,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문 유치원에서는 부모는 물론 ‘조부모의 경제력’까지 물어본다고 한다. 자녀들은 ‘부모장학금’으로 학벌을 취득한다. 세밀하게는 ‘엄마의 정보력, 조부모와 아빠의 경제력’이 대학입학의 향방을 결정한다. 반대로 부와 명예가 배타적으로 세습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상처받는 젊은이들은 냉소와 무력감, 우울감에 사로잡혀 일할 의욕을 상실한다. 이럴 때 교육현장은 사실상 ‘동물의 왕국’이다.

융 심리학자 이나미 박사는 <한국사회와 그 적들>(추수밭, 2013)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회는 “땀 흘려 일하기 싫고, 부동산이나 부모 유산만 바라보는 퇴폐적 물신주의에 빠진 젊은이만 양산한다”(73쪽)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 자격증, 로스쿨, 대학원을 준비하는 백수들은 넘쳐나지만, 기업은 인력이 모자라 노인이나 이주노동자에게 매달려야 한다. 중산층 이상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노인이 될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게 준비하면서 자녀들을 교육하는 게 아니라 ‘사육’한다.

그러면 부모들은 자녀를 어떤 철학으로 양육하는가? 이나미 박사는 이렇게 전한다.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설령 네가 잘못해도 꼭 사과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을 이겨라(커닝이나 폭력 정도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것만 챙겨라(약하고 아픈 사람 도와줄 필요 없다)” 우리사회가 상위 1%만이 ‘위-중심-안’에 들어가 안착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아래’에서 고생하고, ‘주변’에서 외롭고, ‘바깥’에서 가련한 인생이며, 그들은 학교에서 들러리에 불과하다.

 

사진출처=pixabay.com

권력의 바깥에 존재하는 기간제 교사

‘아래-주변-밖’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감당할 수 없는지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2014년 겨울 백화점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청년이 스스로 ‘vip’라고 주장하는 ‘고갱님’에게 모욕을 당했다. 무례하게 굴었다고 그 ‘알바생’에게 무릎을 꿇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노동자는 속절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이 사건은 모두가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알바생은 ‘생존’이라고 말할 테지만, 백화점 입장에서 이 청년은 그저 쓰고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비재’일 뿐이다.

특별히 ‘안-밖’의 지엄함을 알려준 사건도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초원·이지혜 교사는 기간제 임시교사라는 이유로 공무원연금법상 ‘순직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정규직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후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우여곡절 속에 2017년 7월 14일, 희생된 날로부터 약 3년 3개월 만에 다른 정규직 교사와 마찬가지로 순직 인정을 받았다. 이는 안(정규직 교사)과 밖(기간제 교사)의 차별과 배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실상 한국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거나 ‘비정규직’ 노동자인 경우에 언제든 모욕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간제 교사의 경우에 국영수 등 ‘주요과목’ 담당이 아니거나 여성이거나 가르치는 방식이 학생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진짜 선생님도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 2016)에서 “기간제 교사는 권력의 ‘아래’가 아닌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불가촉천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학교라는 제도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계’에 존재한다. 그래서 비상상태가 벌어지면 곧바로 제도 바깥으로 내쳐지면서 학교라는 제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기간제 교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학교에 달려 있다. 학교가 기간제 교사와 맺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 경우에 그 교사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제도 안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제도 바깥으로 밀어냄으로써 간단히 해결한다. 아르바이트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진출처=pixabay.com

‘안’에 대한 욕망으로 ‘바깥’을 인내하는 사람들

엄기호는 우리 사회가 소비자본주의라는 사실에서 더 큰 불행을 발견한다. 소비자본주의는 모욕의 피라미드는 낳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현장에서 받은 모욕을 시장에서 ‘소비자’가 되어 다른 노동자에게 되갚아 준다. 이렇게 ‘안-밖’의 문제는 ‘밖’과 ‘밖’의 갈등으로 대치된다. 그들은 학교나 직장, 국가에서 받지 못한 존중을 오로지 소비자로서 누리려고 한다. 다른 모든 사회적 장에서는 ‘쿨’해지거나 비굴해지고 오직 시장에서 소비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며 존중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만나는 다른 노동자의 존엄을 짓밟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모욕의 피라미드는 결코 바깥에서 안으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또는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들에게만 가혹하게 행사된다. 하청기업 비정규직 노동자조차 이주노동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처럼. 원천적으로 존중받는 경험이 부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엄이 침해받았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재수 없다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며 분노할 뿐이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권력으로 온갖 방식을 동원해 ‘갑질’을 부린다. 그는 기업의 고용주들과 마찬가지로 ‘손님은 왕’이라고 스스로 세뇌시킨다.

엄기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적인 상징’을 통해, 우리시대를 새로운 ‘신분사회’라고 평가한다. 노동력이 남아도는 시대에 사람을 ‘안’과 ‘바깥’으로 나누고, 바깥의 존재에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미끼로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일회용품처럼 써먹다가 버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구의역 내선순환 승강장에서 용역업체 은성PSD 직원 김군(19세/남 97년생)이 스크린도어에 끼여 사망했다. 피해자는 평소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그로 인하여 항상 가방에 컵라면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이 열악한 근로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서울 메트로의 자회사로 전환되면 공기업 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습노동을 했던 김군은 철저히 ‘바깥’의 존재였다. 그는 학벌사회에서 인문계가 아니라 전문계 학생이었다. 그는 실습노동을 하는 동안 학생이었기 때문에 노동의 바깥에 있었고, 노동을 했기 때문에 학교 바깥에 있었다. 그는 서울메트로 ‘바깥’인 외주 하청기업의 노동자였으며, 여기서도 비정규직이었기에 그 하청기업에서조차 ‘바깥’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 책임지고 싶어하는 ‘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김군의 법적 지위였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하청기업의 정규직이 될 수 있고, 조금만 더 잘하면 메트로의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끝내 죽임을 당했다. 이게 불균형 사회의 하층 노동자들의 일상이다. 문화가 따로 있나, 일상을 둘러싼 모든 게 문화 아닌가 싶다. 불균형 문화는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일방적인 죽임의 문화다.

사냥꾼의 사회, 빗장 건 사회

지그문트 바우어는 <액체 근대>라는 책에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만 추구하는 사회’를 사냥꾼의 사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냥꾼이 될 수 없다면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면 낯선 존재를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익숙하고 동질성을 갖춘 이들과 제한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이를 두고 엄기호는 <단속사회>(창비, 2014)에서 ‘빗장 건 사회’라고 불렀다. 그러면 누가 빗장을 걸고 있는가?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틈입자로부터 빗장을 걸어두어야 하고, 연민이나 양심 때문에 스스로 빗장을 해체시키지 않도록 마음에도 더 튼튼한(몰염치한) 빗장을 걸어두어야 한다.

서울의 경우에 강남이나 목동, 혹은 강북의 상암동 같은 중대형 평수의 중산층 중심 아파트단지가 대표적이다. 이 동네는 입시학원과 운명을 같이하며, 아이들도 비슷한 평수에 거주하는 또래들과 집단을 형성하며 끼리끼리 놀기 쉽다.

 

사진출처=pixabay.com

불균형 사회의 결과: 아무도 노동자를 꿈꾸지 않는다

엄기호는 <단속사회>에서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비틀린 관점을 지적한다. 민주노총 등 197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에 동참해 왔던 세대는 “역사 진보의 주역은 노동자”라는 자긍심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 조직/비조직 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공장노동자뿐 아니라 알바와 서비스업 노동자등 노동집단의 다층화 때문에 ‘노동’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공존한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가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심지어 노동자의 적이 노동자일 때도 없지 않다. 그리고 청소년을 포함한 젊은 세대는 노동을 다만 ‘돈벌이 수단’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장래 희망이 ‘건물주’라는 말은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학교에서는 장차 어떤 형태이든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의 신성함, 노동의 권리, 노동강도, 노동과 자본의 대립, 노동과 휴식 등 노동을 둘러싼 이야기 자체에 거의 침묵한다.

학교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을 ‘징벌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 상습적 흡연과 폭력 등으로 교칙을 어긴 경우에 두 가지 형태의 징벌이 따른다. 하나는 요양원 등에서 봉사 점수를 따거나, 화장실 청소 등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조차 기피하게 되고, 노동을 ‘귀찮고 더럽고 힘든 일’로 여기게 된다. 심지어 어떤 대안학교에서는 교칙 위반의 징벌로 ‘절’을 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수행의 수단인 절이 갑자기 징벌적 도구가 되면서, 학생들은 봉사와 노동과 수행을 부당한 그 무엇으로 여기게 되고, 기피할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사회적으로 봉사와 노동과 수행은 ‘아래-주변-바깥’ 존재에게나 어울리는 일이 된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한국사회의 청년들이다. 장사를 할지언정 노동자는 되지 않겠다는 청년들이 대다수인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10분의 휴식을 위해 50분의 지루한 수업을 견디는 학교생활을 통해, 동료 노동자들와의 10분 휴식을 위해 50분의 힘겨운 노동을 견뎌내는 노동자의 몸을 만드는 훈육공간이라고 엄기호는 말한다. 그리고 대량소비는 이런 지겨운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익은 위-중심-안으로, 위험은 아래-주변-바깥으로

그러나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취업한 노동자들 역시 ‘위-중심-안’에서 이윤을 독점하는 세력에 의해 불안정성을 경험한다. 이를 흔히 ‘의자뺏기 게임’이라 부른다. 자리는 언제나 모자라고 게임이 반복될 때마다 누군가는 탈락하고 추방되어야 한다. 이처럼 누구나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이 공포 때문에 굳이 회사 측에서 강요하지 않아도 노동자들은 ‘위-중심-안’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세계는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쏠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엄기호의 <단속사회>에선 택배 노동자를 예로 들고 있다. 택배노동자는 형식적으로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다. 택배 한 건에 2,500원이면 노동자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550원 꼴인데, 운송장 비용 100원은 택배 노동자가 부담한다. 결국 택배 한 건당 노동자에게 떨어지는 돈은 450원이며, 하루 평균 150군데를 돌아다녀야 7만5천원을 벌 수 있다. 한 달에 25일 일하면 200만 원이 소득이다. 그런데 택배노동자는 사실상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차량 감가상각비, 기름 값 역시 그가 부담해야 한다. 물론 노조도 없고, 가혹한 노동만 남아 있다. 이처럼 택배회사는 매출의 75%를 가져가는 구조이다. 이처럼 노동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노동자가 부담하고, 이익은 자본이 가져간다.

노동조합이 있는 정규직 노동자라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12년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최강서는 대선결과가 발표되자 목숨을 끊었다. 절망감 때문이다.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농성과 희망버스 등 사회적 연대로 92명의 정리해고자가 현장에 돌아왔으나, 한진중공업은 이들이 복직하자마자 강제휴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노조를 상대로 158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손해배상 청구 범위는 조합원의 보증인인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노조 조합비는 물론, 조합원의 개인통장과 부동산까지 압류대상으로 확대된다. 이 때문에 해당 노동자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가족해체를 경험한다. 이들은 갑자기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 절망하고, 노조 조직차장이었던 최강서는 정권이 바뀌면 달라지려나 기대했다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결국 자살했다. 이런 방식으로 주류세력은 비주류 세력을 고립시킨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래도 희망은 아래-주변-바깥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아래-주변-바깥에 있었던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강생’(육화)에 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고, 그분이 예수라는 믿음이다. 고대신화에서 신격은 곧 임금이나 귀족들에 갈음하고, 인격은 노예에 갈음한다. 그러므로 강생은 곧 임금께서 노예가 되신 사건이다. 왜? 노예살이 하는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느님은 ‘아래’에 머무신다. 칼 라너는 하느님을 ‘근심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분은 인간의 고통에 근심하시다 인간이 되기로 작심하는 분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사실 하느님께 해 준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는 ‘중심’에 머문 적이 없었다. 유대교 사회에서 임금도 사제도 율법학자도 아닌 일개 평신도이며 하찮은 노동자였다. 그는 유다 출신도 아니고, 예루살렘 시민도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사회의 변방인 갈릴래아 출신이다. 갈릴래아는 소작농들의 거처이며, 죄인들의 땅이며, 민란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즐겨 말하듯 ‘변방’에 속한다. 그리고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나자렛 인근의 세포리스나 갈릴래아 호숫가의 티베리아스 등 ‘로마식 중심 도시’에 들어가셨다는 보도가 없다. 그분은 촌락에 머물거나 주로 야산이나 들판,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예수는 주로 ‘바깥’에 머물렀다. 예수는 공생활 초기에는 주로 촌락 회당을 중심으로 설교하셨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득세하는 회당에서 정결법과 안식일법 등으로 자주 마찰을 일으키면서 회당에서 밀려 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는 회당에서 이 예언서 말씀을 전하고서, 곧바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두둔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 곧 ‘유대체제 바깥’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회당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분의 친구들은 어부와 세리와 혁명당원, 과부와 고아와 병자들이었다. 그리고 일정하게 유대교의 경계에 있던 여자들을 가까이 하였으며, 이 여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다. 무엇보다 ‘아래-주변’의 사람이었던 예수가 죽고 또한 부활한 곳도 ‘성문 밖’이었다.

고난이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역시 체제의 ‘아래-주변-바깥’이다. 교회가 경청해야 할 목소리는 그곳에서 들린다. 교회가 손잡아 주어야 할 사람들도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참조]

<한국사회와 그 적들>, 이나미, 추수밭, 2013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다>, 엄기호, 창비, 2016
<단속사회>, 엄기호, 창비, 2014
<예수의 독설>, 김진호, 삼인, 2008
<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하느님과 제국>, 존 도미니크 크로산, 포이에마, 2010

*이 글은 주교회의 정평위, 서울대교구 정평위 주관의 제7회 사회교리주간(2017.12.10)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한 '문화적 불균형'에 관한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