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엘로이 주교 "핵무기 시대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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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엘로이 주교 "핵무기 시대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
  • 로버트 W. 맥 엘로이 주교
  • 승인 2017.12.12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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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평화를 위한 기반-1

가톨릭의 전쟁과 평화윤리에 대해 말할 때, 복음의 명료한 메시지에서 흘러나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평화 전통의 힘을 간과해선 곤란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분명히 평화주의가 교회의 신학적․사목적 삶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모습이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원수들에 대한 참된 사랑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전쟁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생명을 조직적으로 살상하는 일을 인정하실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군 복무는 황제 숭배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일이 그럴 만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전쟁과 그리스도인은 양립할 수 없다

테르툴리아노와 오리게네스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과 전쟁에 참가해 도움을 주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사실도 자명합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군 입대를 상당히 주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성인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무기를 드는 걸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무고한 이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죽이는 일 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신의 영혼과 피를 즉시 내어줍니다."

교회사에서, 곧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부터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e)의 핵심 증언에 이르기까지 영웅적인 신자들은 전쟁의 야만성에 대해 유일하게 참된 그리스도교적 응답이 '평화주의'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증언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주의는 무저항이 아닙니다. 평화주의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맞서 싸우는 데 전념하며, 그러한 악과 싸울 때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권을 보호할 때 큰 희생을 바칩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는 전쟁의 유산을 보면서, 전쟁에서 이러한 악이 패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해진다고 결론 내립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한테 평화주의적인 저항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열심히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어떻게 그 이방인을 살해하는 일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정당한 전쟁론의 전통을 현대 전쟁에는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의 고향인 북아프리카가 침략을 당하자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하니 이 악을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전쟁’의 전통은 전쟁의 시작과 대응에 상당히 실질적인 제약을 가하는 전쟁의 필요성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지난 15세기 동안 가톨릭 전쟁 윤리의 중심 틀로 기능해왔습니다. 인구의 다수를 희생시킬 수 있는 즉 기본권을 박탈할 수 있는 군사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인류사의 특정 시점들에서는 공격에 대한 무장 저항이 정당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전쟁의 속성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정당한 전쟁 전통에서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생겼습니다. 전략적 폭격의 발명으로 전장(戰場)이 변하였고, 모든 국가가 현대 무기, 전술과 전략의 표적이 되는 섬뜩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량 살상 무기는 범위와 규모를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자신의 존재를 파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엄청난 위협을 암시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무기의 확산은 섬뜩한 계산을 하게 만듭니다. 즉, 나중에 전쟁에 의지하게 되어 서로 싸우게 될 때 핵보유국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계산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는 바로 그 현실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원자핵 시대에 전쟁을 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다

이에 비추어 우리 가톨릭 공동체와 사회 모두는 왜 가톨릭의 도덕적 가르침이 전쟁에 맞서 극적으로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는 “원자핵 시대에 전쟁을 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고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더 이상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현재 전쟁의 파괴력으로 봤을 때 정당한 전쟁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의문을 표시하였습니다. 이처럼 현대 교황들은 전쟁을 합법화할 가능성을 좁혀 놓았습니다. 특히 가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국가가 전쟁을 대신할 수 있는 방안들을 철저히 강구하도록 의무를 부과해왔습니다. 아울러 전쟁에 호소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의 범위도 상당히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처,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교회는 모든 나라가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평화를 건설하는 과정에 참여할 중대한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러한 연구소를 설립하고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북한과 대화하려는 한국 주교님들의 노력은 대화와 발전에 앞장서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미국이 북한과의 갈등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미흡한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북미 관계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런 한계가 매우 잘 드러났습니다. 북한의 행동에 미국이 불만과 의심을 품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경우들에서 조차도, 이러한 중요한 단계에서 미국이 보인 반응들은 보복 조치, 북한에 대한 단계적 압박, 비난과 지원 철회 등이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전쟁과 평화 윤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매우 강조하는 평화 건설의 자세와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몇 가지 경우에서 미국이 북한에 보였던 반응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를 긍정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잃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 대립의 시기에 평화 건설의 본질을 알려주어야 한다

현재 미국과 북한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미국 (가톨릭) 교회가 대화에 주로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이 이러한 위기 상황에 있는 미국과 모든 세계에 부여한 의무를 참되고 효과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여에는 현대의 전쟁의 위험이 정당한 전쟁 전통의 전통적 한계에 관해 새롭고 긴박한 도덕적 제약을 추가해왔다는 가장 강력한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가톨릭 공동체와 더 많은 사회에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험이 따른다 할지라도 대립의 시기에 평화 건설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미국 민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현실 가운데 하나는, 흔히 들어왔던 것과 상반되긴 하지만 위험 없는 대안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쟁을 시작하기보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선 위험을 끊임없이 감수해야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미국 가톨릭 공동체의 이러한 성찰은 파장을 불러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수십 년 동안 전쟁에 의존하는 방법을 추구한 신자들조차 정당한 전쟁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이 성찰은 참된 마음의 회개, 인간의 마음을 갉아먹는 전쟁 심리에 대한 거부, 무장 충돌이 아니라 화해를 향한 훨씬 더 심오한 운동으로 평화를 위해 싸우는 길을 옹호하려는 기꺼운 마음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로버트 W. 맥 엘로이 주교
미국 샌디에고교구 교구장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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