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가슴을 열라고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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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가슴을 열라고 초대한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2.1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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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부르심-2]

교육을 받고 괴변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사람들인 우리로서는 하느님의 말씀의 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를 그분께 맡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것을 진실로 신뢰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히 대화에 끼지 못하고 만다. 반면에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런 대화를 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이들은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그들의 역사 속에서, 삶 안에서 주님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좋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같이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비오 10세가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영적으로는 모두 유대인이다. 성서가 진실로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우리는 히브리 선조들이 갖고 있던 창조에 대한 태도, 역사에 대한 성서적 통찰력, 삶에 대한 실존적인 생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인류 공동의 경험이 드러나고 의미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 말씀이 언제까지나 새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읽을 수 있으며 읽을 때마다 우리가 새로운 장소에 있기 때문에 말씀은 새로운 깊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군가 말했듯이 진리가 더 이상 새롭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서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히브리인들이 무엇을 신앙이라고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말했듯이 신앙은 항상 사람에 대한 믿음이고 사람은 머리, 가슴, 의지로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믿음이란 참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인 것이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인 차원의 이야기 역시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지적이지 않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은 단지 믿음의 일부라는 것이다. 믿음은 그저 진실한 사상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경험인 것이다.

가톨릭의 옛말 중에 "악마조차도 진리는 안다"라는 말이 있다. 악마도 교회의 교리, 교의를 안다. 그러나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다. 믿음이란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신앙이란 단순히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는 이것을 믿는다. 나는 저것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진리는 알 수 있으나 단 한 순간도 하느님께 의탁하거나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찾지는 않는다.

야훼가 이스라엘인에게 가르친 신앙은 매우 단순하게 희망과 믿음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결코 실망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 하느님 안에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찾으라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삶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대에 찬 믿음을 갖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그들 삶에 들어오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시도록 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가 그러해야 하듯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의 약속을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여러분이나 나보다 그 분의 목소리를 더 자주 듣거나 비전을 더 많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지간에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 차렸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고 그 은총을 받았다.

그들은 그 은총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꺼이 어둠을 넘어 응시하려고 했으며 약속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히브리인들에게 역사란 약속과 그 약속이 완성되는 사이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기를,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신앙의 사람들은 계속 허공 너머를 봐 왔으며 이런 모든 불합리하고 무의미하고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약속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 시대에는 히브리인들만이 역사가 어떤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사는 방향이 있었다; 역사는 끊임없는 순환이 아니다. 시간은 곧바로 나아갔다; 시간은 목표 없이 동그랗게 도는 것이 아니다. 삶은 히브리인들을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삶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었다. 그들은 삶 속에서 목표를 갖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섭리를 경험했고 그것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선이시고 그 분이야말로 실제 주님이시고, 그 분이 그들을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계시며 그들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인식에 그들의 전 삶을 의탁했다.

그러나 가끔 그들은 이런 비젼을 잃어 버려서 예언자들이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은 이 비젼을 갖고 있는 척 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인 예배 같은 종교 놀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기쁜 소식을 희석시킬 때, 그들이 이끌려 가는 방향을 잃었을 때 하느님은 이사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이 부르심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들이 나를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일 따름이다."
(이사야 29,13)

예언자들의 말이 우리 종교 행태를 꼭 짚었다는 것을 보면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 만든 율법, 암기한 교리. 

그러나 하느님은 실망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해도 그분은 내치지 않으신다. 위의 귀절에 뒤따라 나오는 아름다운 말씀을 들어보라. 그분은 “...그래, 나는 이 백성들에게 놀라운 경이를 아낌없이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분은 다시 “나는 놀랍고도 신비한 방법으로 내 사랑을 그들에게 계속해서 부어 주겠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나를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을 더 아름다운 미래로 이끌 것이다.”

그들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이고 아낌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도,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새로운 삶을 믿지 않았을 때도 그 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 주셨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삶이 자신들의 순종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 여부가 주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이다. 우리 인간들을 가르는 유일하게 진실한 차이는 바로 이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복음은 항상 미래, 새로운 곳, 약속된 땅을 가리키고 있다. 복음은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의 모순은 우리가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래 그땐 기적이 있었지, 그땐 하느님이 정말 하느님이었지, 그땐 위대한 예언자가 살았었지, 중세 시대에는 위대한 성인이 있었지..”라고 말한다는데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이 아닌 보수적인 힘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며, 종교 훈련만을 했을 뿐 하느님 말씀의 힘과의 접촉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은 주님께서 항상 우리 자신이 만든 우상과 우리 자신의 불안으로부터 주님이 주실 안전함, 주님이 창조하실 미래로 우리를 이끄신다는데 있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종교로서, 우리 자신이 만든 우상과 방어기제를 부수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탁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 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불안을 견디는 안전함을 주며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향하게 한다.

예언자의 사명은 하느님의 이 새로운 말씀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하고, 그들에게 항상 더 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상기시키는데 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주어진 비전을 상실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녘에서 동녘으로 돌아다니며
야훼의 말씀을 찾아도 들을 수 없는 세상이다."
(아모스 8,11-12)

지난 400년간 그 같은 기근이 교회 안에 있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우리의 힘을 잃었다. 만일 교회 안의 우리가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성 생활이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시도록 우리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라고 불리는 이 책이 교회를 이루는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서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에게 성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구약성서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하며, 신약은 자신들이 익숙치 않은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의 가슴에 말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그분과의 대화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서 말씀에 당신의 가슴을 열도록 다시 한번 초대한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면 그 분은 당신께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변하겠지만, 우선 당신이 그것을 원해야 한다. 마음을 다해 그것을 찾아야 한다. 당신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으리라고 시편에서도 말했듯이 나도 그것을 약속할 수 있다. 당신은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부르심은 말씀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의 일반적인 초대다. 그 부르심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오게 되었는지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어디로 초대하고 계신지를 알기 위해 성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책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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