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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은 얼굴 찾기

[윤영석 칼럼]

지난 5년간 병원사목을 하면서 ‘환자들이 가장 공감하는 종교인을 꼽으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이미 한국에선 잘 알려진 틱낫한 스님일 게다. 매주 세 번씩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인용구를 화두로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들과 영성그룹을 인도하는데 틱낫한 스님 인용구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스님을 모르더라도 그의 인용구를 읽고 나서 마음에 와 닿는 게 많은가 보다. 영어로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굳이 적거나 스님이 쓴 책을 추천해 달라고 묻기도 한다. 병원에서 어떠한 포교 행위도 금지하는데 신부가 스님 책을 간접적으로 팔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마음챙김 또는 깨어있음

틱낫한 스님은 기성 종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 병원 분위기에서도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미국에서 1979년 존 카바트 진(John Kabat-Zinn) 박사가 MBSR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을 발판으로 30년 이상 꾸준히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건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Mindfulness 명상법은 힌두교 수행법인 요가가 종교적 색채를 감추고 큰 호응을 얻은 것처럼 “none” 혹은 “spiritual but not religious”들 사이에서 큰 인기다. Mindfulness의 원어는 산스크리어 “싸띠”에서 유래했다. 보통 한국어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를 ‘알아차리기’라고 번역한단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정신 차림'이 바른 번역이라고 한다. 나는 ‘깨어있음'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깨어 있으라.” 환자들은 과거와 미래를 집착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깨어 있으라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에 가장 공감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먼저 이 말을 하셨는데 제자들의 마케팅 능력이 영 시원찮았나 보다. 우리는 이번 대림절기를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말씀과 함께 맞이한다 (마르 13:24-37). 그렇다면 우리는 깨어 있되 무엇을 향해 깨어 있는 걸까? 부활하신 예수의 다시 오심에 항상 깨어 있는 신앙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로 올 지 천사들도 당사자도 모른다고 신신당부 하신다. 오직 성부 하느님만이 그 때와 장소를 아신다고 한다. 결국 이 말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가 언제 어디로 올 지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이다. 절대 알 수 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시간낭비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깨어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찾아오시는 예수를 알아차리는 게 우선이다. 좀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영적 촉수’를 분주히 움직이는 일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의 얼굴이 우리를 비추면

대림절의 영성은 연말 분위기를 한껏 높이며 성탄절을 기리기 위해 우리 마음밭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바라보는 데 있다. <시편> 기자는 80장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 “만군의 하느님, 야훼여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우리가 살아나리이다.”(공동번역, 시편 80,3,7,19) 하느님의 얼굴이 우리를 비추면 우리는 살아난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낮보다 저녁이 길어지는 지금 이 시간, 정치 사회적으로 어둠이 빛을 압도하는 것처럼 느끼는 우리 시대에 하느님의 밝은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어두운 그림자에 당신의 얼굴을 꽁꽁 숨기신다. 이사야 예언자의 경험처럼 마치 하느님 당신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듯하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시대에 이렇게 느끼시지 않았을까? 도무지 하느님의 밝은 얼굴 찾기가 힘든 걸 예수께서도 아셨기에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는지 모른단 상상을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긴 채 우리에게 오시는 이 대림절의 첫 주를 맞는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는지 묵상한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건장한 청년의 예수 모습이다. 피부는 보기 좋게 그을려 있다. 흔히 서양화에서 보이는 깻잎 머리를 한 파란 눈의 금발 백인은 아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에 턱수염이 그득한 중동인의 얼굴이다. 목수 출신인 만큼 팔에 근육도 제법 있다. 키는 175 cm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데 다짜고짜 청년의 모습을 상상하다니 뭔가 잘못됐다. 비록 십자가에 못박히고 처참하게 능욕 당한 가난하고 연약한 청년 예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고른 이미지는 힘의 예수다. 더럽고 치사한 세상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힘을 가진 존재'라고 무의식적으로 믿었는지 모른다.

가장 쓸모없는, 연약한 하느님 

이제 이 권력을 채색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부숴야 한다. 성육신의 신비를 다시금 살펴 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됐다. 예수 시대에 가장 연약하고 착취당하기 쉬운 그룹으로 볼 수 있는 십대 소녀 마리아의 몸을 택했다. 고귀한 집안의 딸의 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마리아의 자궁에 당신의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부모의 도움 없이는 며칠도 살아남을 수 없는 아기가 됐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연약하고 지금 우리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떤 이윤도 낼 수 없는, 그래서 가장 쓸모 없다고 볼 수 있는 아기가 됐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라는 성육신의 신비는 그리스 신화와 얼추 비슷하게 “신이 신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 됐다”는 데 있다기 보다 “신이 가장 연약한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예수는 인류에게 드러난 가장 인간적인 하느님의 얼굴이다.

바로 지금 여기 오늘도 하느님께서 세상 가장 연약한 곳으로 찾아 오신다. 우리 모두 숨기고 싶은 상처가 있다. 이 상처는 때론 곪을 대로 곪아서 악취를 풍긴다.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내 목을 졸라대며 못났다고 무능하다고 내 자신을 학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안에 숨기고 싶고 없애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가장 연약한 상처 틈새로 하느님의 감춰진 얼굴이 드러나고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의 숨은 얼굴을 본다.

그렇게 보이는 하느님의 밝은 얼굴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를 회복시키고 살린다. 누군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해도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끝없는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신다. 이게 우리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은총은 아닐까?

위가 아니라 오직 아래에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숨은 얼굴을 발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장,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숨겨진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성육신에 관해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게 한가지 있다면, 바로 하느님은 낮은 곳으로, 낮은 자로 향하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위가 아니라 오직 아래에서 당신의 숨은 얼굴을 드러내신다. 우리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연약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숨은 하느님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그제서야 얼굴 값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숨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우리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 깨어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 부활한 예수를 보기 위해 깨어 있다. 이번 대림절기를 맞이하며 세 가지 깨어 있는 기도를 드린다. 첫째로, 우리 영혼 가장 연약한 곳에서 당신의 숨은 얼굴을 예수를 통해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위해, 둘째로 우리 주위 가장 연약한 곳에서 숨은 얼굴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위해, 마지막으로 우리의 얼굴이 하느님의 숨은 얼굴을 드러내는 데 쓰임받는 은총을 위해. 
 

윤영석(바울로) 신부
미국성공회 뉴왁교구 소속 &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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