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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을 위한 활동가네팔 카나의 집 이야기-마지막

[이금연 칼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의미하는 희생적이고 숭고한 사랑의 행위를 우리는 일상에서 목격 하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둘 다 쉽지 않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또 자주 볼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작은 실천이라도 시도하면서 차차 그 의미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진=이금연

활동가들과 히말라야를 오르며

이번에 노동조합 활동가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을 통하여 이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공동선을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활동가들, 그들은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직업적 운동에 매몰되어 건강과 생기를 잃고 있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다 한쪽 눈을 실명한 여성 운동가, 단체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동료 두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몸에 암을 퍼뜨린 중년의 운동가, 해도 해도 안 되니 크레인에 올라 세상에 대고 외치는 방식의 투쟁으로 온 몸이 굳어 버린 이들과 함께 만 12일 동안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고행에 가까운 훈련 프로그램을 한 것이다.

자신의 몸을 축내면서 타인들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삶을 바치려는 사오십대 중년기의 이 참가자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껴, ‘나는 활동가를 위한 활동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멈추지 않고 재정도 마련하고 시간도 내어 그들을 인솔하고 네팔로 온 나의 친구에게서 ‘벗들을 위하여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는 수정 같은 정신의 힘을 보았다.

함께 걷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진=이금연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의 벗이 치열하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려 하니 나도 그녀의 태도에 따라 단순한 진행자가 아닌 그 일행의 한 구성원이 되어 동행자가 되는 것이다. 함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상호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환자 일행들과 해발 3,210 미터의 푼힐 전망대까지 오르고 내리는 과정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곳에 닿기 위해 또 닿자마자 다시 내려와야 하는 긴 행군의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물러 설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길을 조금씩 걸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날씨의 변화에도 순응을 해야 했다.

파노라마 그 자체인 히말라야 산자락의 기후 변화에 따라 우리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면서 끝까지 걷고 나면 자기 자신이라는 그릇에 만족감이 채워지게 된다. 전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은.

다만 그 과정에서 동료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손을 잡아 주고, 짐을 대신 져 주며, 따뜻한 차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돌보아 주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력으로 자기 삶의 주인공인 ‘나’라는 주체 안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거기에 약간의 영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자기 인식 도구들을 사용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것으로 효과를 더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사진=이금연

어떤 앙금도 없이 충만한 시간

고통스런 과정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상호 변화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행을 선택하여 수행을 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복음사가의 기록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라고 요구한다. 공동선이라는 대의에 취해 에고의 단단한 껍질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매일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행위로 얼마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평화를 잃고 마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이런 매너리즘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 스스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성찰해 볼 일이다.

좋은 벗을 두어 의미 있는 일을 마음의 균열 없이 해냈다. 나무가 완전 연소되어 보드라운 재만 남긴 것 같이 어떤 앙금도 없이 충만한 시간이었음을 내 자신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들도 한국에 도착하여 고마움의 인사를 보내 올 때 다시 공동의 목표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야 할 때라는 것을 확인한다. 만년설 히말라야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할 때 생기는 놀라운 변화의 힘이다.

그러나 만년설이 예전의 만년설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런 여행 프로그램도 이제 막을 내려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변화된 사람은 담장에 기대어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 아래서도 휴식과 위안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높은 산을 오르는 고행을 우리는 일상에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서 차츰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가진 슬픔과 두려움을 있는 그 자체로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노동운동가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마지막으로 네팔에서 진행 해온 카나의 집 활동도 막을 내리고자 한다. 내가 사는 공간에 그리스도의 방을 한간 마련해 놓자는 그래서 어떤 나그네도 환대 받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자는 오래 전의 카파도키아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운동이 두루 두로 확산되기를 바라면서.


이금연 세실리아
국제 가톨릭 형제회 (AFI) 회원
네팔 환대의 집 'Cana의 집' 활동가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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