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트완 신부 "군축 없이 평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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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완 신부 "군축 없이 평화 없다"
  • 앙트완 아비 가넴 신부
  • 승인 2017.12.0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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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앙트완 아비 가넴 신부-평화와 군축

교회가 자신의 신앙, 가르침과 많은 신자들의 투신으로 이 세상에 육화하고자 할 때, 교회는 권리 뿐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는 세상의 걱정과 희망을 나눌 의무도 있습니다. 각 사람과 인류 전체를 위해 교회가 가져야 하는 관심은 교황청이 자체의 외교행위 틀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원칙입니다.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지키거나 추구할 상업적, 군사적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는 까닭에 각 사람과 모든 사람의 이익에 봉사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인류 가족 전체의 공동선에 봉사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허락된 시간 안에, 한반도라는 현실적 맥락에서 평화와 군축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주제를 소개한 다음, 세 가지 강조점에 대해 각기 차례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군축과 안정’, ‘군축과 안보’, ‘군축과 발전’입니다.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

평화에 대한 갈망은 군사적 수단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사람의 마음속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갈망의 원천을 같은, 그리고 고유한 인간 가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평화는 우리 공통의 목표입니다. 또한 평화는 공정하고 모든 이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수 조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몇 마디로 요약하십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군사적 수단만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핵무기와 다른 대량 살상 무기들을 훨씬 더 줄여야 합니다.…평화는 정의, 사회­경제 개발, 자유, 인간의 기본권 존중, 공공 활동에 모든 이의 참여, 사람들 사이의 신뢰 구축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에 바탕을 두고 교회의 의무와 역할을 인식하면서, 교황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전쟁의 악몽에서 막 벗어나고 있는 세계의 물질적 영적 재건에 필수불가결한 평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설립된 국제 공동체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국제기구를 위해, 그리고 모든 국가들에게 강력한 신호를 보내기 위해 교황청은 거의 모든 조약들과 군축협정과 군비축소에 관련된 규약에 서명, 비준하였고, 여러 요구에도 응하였습니다. 관련 무기는 대량살상 무기, 화생방 무기에서 시작해 대인 지뢰, 집속탄, 경화기(輕火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정당한 전쟁론이 전쟁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교황청은 군축이라는 대의(大義)를 실현하기 위해 능동적인 행위자이자 협력자 역할을 자임해왔습니다. 물론 군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조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영역에서 교회가 한 역할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이 회의의 주제는 아니지만 정당한 전쟁론에 기대지 않기 위해 정당한 전쟁론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당한 전쟁론은 갈등이 일어나기 전, 갈등 중에, 그리고 갈등이 종결된 뒤에 평화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군축에 참여할 때, 교황청은 단지 평화를 요청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확신, 회복력,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이와 함께 일하려는 의지를 요구하는 복잡하고 오랜 여정에 이르는 일상적인 활동에 구체적으로 함께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류 가족 가운데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든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갈등을 예방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단순한 평화를 넘어서는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평화의 인간 요인 (human factor)’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인간 요인에는 먼저 평화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의 역할을 고려하는 일은 물론, 평화를 위협하고, 심지어 무기와 폭력에 호소함으로써 평화를 거부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책임과 의무에 따라 전쟁을 종식시키고 무엇보다 전쟁을 예방하는 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정의에서 화해로, 군사비 감축에서 군축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 말입니다.”

화해와 군축은 서로를 강화시켜 준다

한 예로 교황청은 유럽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증오와 비인간적이고 어리석은 전쟁의 결과로 황폐해진 대륙에 평화를 건설하는 데 초석이 된 화해와 협력을 실현한 다수의 저명한 인물들(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교 정신에 영향을 받은 이들)의 노력과 솔선에 함께 하였습니다.

교회들과 많은 종교인들이 이 노력에 참여하였고, 어떤 때는 그들이 선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화해가 이뤄진 뒤에야 군축과 군축 협정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조치들이 신뢰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고, 화해와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화해와 군축은 서로를 강화시켜 줍니다.

불행히도 냉전으로 이 논리는 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다시 군비 경쟁에 돌입하였고, 수십 년 동안 서로를 불신해왔습니다. 한반도의 현 상황은 지난 20세기의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유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일어난 여러 갈등들로 이 지역에 있는 국가들과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이 ‘공포의 균형’, 군사력, 불신과 군비 경쟁에 기울어 평화를 재건하는 화해의 길을 찾지 못하게 된 점은 유감입니다.

소련 붕괴 후 짧은 기간 동안 낙관론이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산업, 경제, 금융의 지구화에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 많은 나라들과 사람들은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형제애의 지구화, 모든 이를 위한 통합적 발전, 정의로운 평화 대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리켰던 무관심의 세계화, 불의한 사태의 급증, 과거 갈등으로의 회귀와 새로운 갈등을 야기할 뿐인 과도한 군사비 지출의 폭발적 증가를 곧 바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무력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는 망상이다

사람, 가족들과 국가들을 파괴하는 많은 갈등들로 가득한 세계의 현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성적이고, 종속시키며, 잊혀 진 이러한 갈등들이 발전을 가로막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망명길로 내몰며, 이주(移駐)를 강요하고, 젊은이들의 꿈을 여러 세대 동안 박탈하여, 약물, 알코올, 또는 급진화의 길, 그리고 파괴적 폭력에 호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평화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 깊숙이에 내재한 심오한 감정입니다. 이 갈망이 전쟁이 없는 상태로 넘어가게 도와줄 것입니다. 평화든 전쟁이든 같은 존엄성으로 창조되었고, 같은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평화나 폭력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보면 인간은 종종 힘의 유혹에 넘어 갔고, 무력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환상 탓에 과거 너무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현대 세계의 비극에서 도 이 환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군사비 지출액수가 이 망상의 정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6년 전 세계는 군사적 목적으로 1조 7천억 달러를 지출하였습니다. 인도주의적 지원에 할당되는 적은 액수와 비교할 때 이 어마어마한 비용은 국가들이 평화와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중동, 북아프리카, 사헬, 남아시아, 그리고 특별히 이 회의를 주최하는 한국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잉 군비는 평화의 바람직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군비 경쟁은 항상 무력 갈등, 불안정, 군사 부문의 재정과 인적 자원을 남용하게 만드는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국경 문제를 악화시켜왔고, 더 잔혹한 소송에 이르게 했으며, 인구 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필수불가결한 자금들을 유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새로운 갈등을 출현시키고, 온존하던 갈등을 지속시키며, 이웃들 간에 평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훨씬 더 심각한 점은 강대국들이 국제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주민들의 실질적인 문제(교육, 보건, 주거, 기아, 환경 등)로부터 국제 공동체의 시선을 다른 데 돌리게 만드는 매우 정교하고 치명적인 무기들의 생산, 현대화, 그리고 이전(移轉)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기로는 안정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군축으로 평화에 투신하는 일에 교황청은 반복적으로 평화로운 세계 질서 건설을 위해 세 가지 단순하지만 중요한 선언을 강조해왔습니다.

무기로는 인간 안보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평화로만 가능합니다. 로마 속담 ‘평화를 바라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은 실제와 맞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그리고 이 두 전쟁 기간 동안 생산하고 축적한 상당량의 무기들은 증오와 갈등만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기를 신뢰하고, 그 무기들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갈등을 일으키고 전쟁을 치르려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군비 과잉, 대량 파괴무기들에서 공포와 불신의 논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포와 불신의 논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안전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로만 가능합니다. 평화로운 세계 질서는 신뢰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책임에 바탕을 둔 윤리로만 가능합니다.

힘으로 전쟁 피하는 것이 평화 아냐

한반도의 핵위기 상황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에 하신 말씀이 잘 들어맞습니다. “핵 억지 전략과 상호확증파괴는 형제애, 사람과 국가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 윤리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과 미래의 젊은이들은 더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 가족의 일치에 바탕을 둔 존중, 협력, 연대와 연민에 근거를 둔 평화로운 세계 질서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은 책임 윤리로 공포의 논리와 맞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신뢰와 진지한 대화의 풍토를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전을 원한다면, 그에 이르는 바른 길과 수단을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과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이 평화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증오의 말, 파괴의 위협, 고발, 수치를 주는 말은 나쁜 선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러한 유형의 대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폭력과 최악의 갈등을 촉발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반도에서 우리가 더 안전하기를 원하고, 평화를 추구하길 바란다면,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차이와 불일치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상호 존중이 필요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제가 미사여구 현상이라 부르려는 것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위험들로 인해 이미 긴장과 걱정이 가득한 곳에 과장된 말 또는 위협하는 구절(句節)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말하는 방식에서, 격앙되고 간절한 어휘 안에서, 은폐된 위협과 겁을 주기 위한 전술들(tactics)에서 드러나는 방종은 냉철하고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문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

무기로는 안정적인 국제 질서 또는 지역 질서 구축을 촉진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는 공포와 불신이 지배하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이 보다 더 한 것은 일시적일 뿐인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비를 지출하고픈 압력을 받는 것입니다. 더 많은 무기와 더 치명적인 기술들을 추구하는 이 영속적인 경쟁은 안정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군축과 불안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십니다.

“지나친 군비 지출의 증가는 무기 경쟁을 가속화하고 저개발과 절망의 고립 지역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어서, 역설적으로 불안과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의 존경하는 선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현명하게 지적하셨듯이,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따라서 각국은 흔히 불의에서 비롯되는 분쟁의 근본 이유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과감한 자기비판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국제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군비 지출을 줄이는 일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절약한 자원을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개인과 민족들을 돕는 발전 계획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인류 가족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위험 요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힘과 무력들 간의 불균형, 불안정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들은 항상 더 강한 나라들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지킬 방도를 찾거나, 비용을 들여 이에 대응하려 합니다.

패권에 대항하는 방법들과 불의로 인식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테러가 이런 양상을 띨 수 있습니다. 무기체계를 지속적으로 정교화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윤의 환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방식은 거의 대부분 확산을 조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비 경쟁은 불신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대량 파괴무기 또는 혁신적인 무기 체계와 같은 억지력이 지정학적 안정성을 뒷받침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훨씬 더 치명적인 무기를 얻기 위한 경쟁은 사악한 자살의 악순환을 조장할 뿐입니다. 불안정이 군비 경쟁을 조장하고, 군비 경쟁은 불안정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세계는 이 맥락에서 어느 정도 그런 것 같아 보입니다.

평화로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 요한 23세께서 일찍이 1963년에 핵무기로 인해 빚어진 불안정과 자기 파괴의 위험의 소용돌이를 군비 경쟁의 원인이라 주장하신 것과 매우 유사해 충격을 받으실 것입니다. ‘군축이 필요하다’가 논리적 결론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화와 협력입니다.성 요한 23세께서는 비오 12세 교황의 다음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평화로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군축과 발전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이러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발전은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이로부터 몇 년 뒤 UN은 군축과 발전이 연계돼있는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십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저는 평화와 발전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돼있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내일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면 둘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계속 이어 가십니다. “누군가를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일에 투신하게 만드는 동일한 가치들이 모든 인간과 모든 백성의 통합적 발전을 도모하게 만드는 가치도 될 것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핵무기에 돈을 쓰는 일은 국가의 부를 낭비하는 일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군축과 발전의 관계를 강조하십니다.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여러 나라와 사회의 충만한 인간적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재정적, 경제적, 인적 자원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이토록 많은 자원들의 전용(轉用)은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상기시키신 UN 헌장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이는 국제 공동체와 국가들이 ‘세계의 인적 경제적 자원을 군비에 최소한 만 전용함으로써 국제 평화와 안보의 확립과 유지를 촉진’(26항)하는 데 참여하도록 한 국제 연합 헌장(Charter of the United Nations)의 내용에 반대됩니다.”

이는 개발도상국이나 경제적 선진국이나 마찬가지로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주변화 된 부분에 영향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핵무기에 대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무기에 다 해당됩니다.

“핵무기에 돈을 쓰는 일은 국가의 부를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비용지출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실수이고, 통합적인 인간 발전, 교육, 보건, 그리고 극심한 빈곤 퇴치와 같이 더 좋은 영역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들을 잘못 배분하는 것입니다. 이 자원들이 낭비되면, 사회 변두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과 허약한 사람들이 대신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연대와 형제애’가 군비 경쟁과 분쟁 해결한다

한반도의 현재적 맥락에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 지역의 역사를 고려할 때, 그리고 평화, 군축, 그리고 발전 영역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맥락에서 가톨릭교회가 이 지역에 있는 나라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소수자,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과거 그리고 현재의 역사 안에 내재된 깊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들의 민족적 기억들을 정화시킬 지속적인 화해, 상호 용서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이 접근법이 긴장을 완화하는데, 그리고 평화를 재건하는데 이르러야 하는 대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입니다.

화해와 새로워진 신뢰가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모든 인간 인격과 모든 국가의 전인적 발전을 위한 투자를 늘리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사목헌장>, <지상의 평화>또는 <민족들의 발전>에서 가르치는 사회교리는 가톨릭 신자 특히 평신도들에게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연대와 형제애’가 군비 경쟁과 분쟁 해결을 위해 힘을 사용하여, 위협하려는 행위를 대체하는 사회의 도래를 촉진하는 이 길에 참여하도록 독려합니다.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평화를 위해 복무하는 군축 영역에서 시민사회, 많은 나라들과 국제기구, 국제 적십자사의 노력들을 지원할 수 있고, 또 지원해야 합니다. 교황청은 이 지역에서 제네바, 뉴욕, 비엔나와 기타 다른 곳에서 양자 또는 다자적 맥락에서 충분히 관심을 갖고 있고 또 실제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투신은 이제 인류가 직면한 큰 위기들, 그리고 대부분의 양자(兩者)적, 지역과 다자적 군축 메커니즘이 교착상태에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합니다.

지구화된 세계에서 국제 협력은 모든 영역(경제, 재정, 안보, 군사, 과학, 개발 등)에서 국가들 간 상호 의존성이 높아 가는 점에 비춰 볼 때 필수불가결합니다. 평화와 안정은 훨씬 더 분리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적대하지 않아야 누구나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이성적이고 연민에 기초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기심과 폭력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앙트완 아비 가넴 신부
교황청 제네바 UN 대표부 참사관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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