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예수는 일부일처제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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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예수는 일부일처제를 지지했다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7.12.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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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마을 공동체 - 1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 구성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의 활동 장소에 따라 짜여져 있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티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볼 때, 갈릴래아 지방,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유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의 지리적인 기본 구성은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던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활동한 후에 수난당하고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 구성을 공간적인 배경을 기준으로 나누면, 갈릴래아 이전(마르 1,1-13), 갈릴래아에서의 활동(마르 1,14-8,26), 예루살렘으로의 길(마르 8,27-10,52),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수난과 부활(11,1-16,20) 이다.

마르 8,27-10,52에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던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나라의 중심이었고, 유다인들의 지배층이 살던 도시,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도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모여 있는 곳, 그분께 적대적인 장소이었다. 그 예루살렘으로 예수가 간다. 그 예루살렘에는 반대자들과 십자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길은 예루살렘으로의 길이었고, 십자가에로의 길이었다. 우리가 예수 운동과 마을 공동체의 주제에 대하여 살펴볼 마르 10,2-45는 바로 이 예루살렘으로의 길이라는 문맥 안에 위치한다. 이 문맥에서 우리는 가정과 마을 공동체, 새로운 사회적 질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대안적 공동체 등의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아내를 버려도 좋은가?

마르 10,2-10의 본문에 따르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남편 쪽에서의 이혼의 정당성에 대한 법적인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마르 10,3)라고 되묻는다.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대답하자 예수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라고 말한다. 병행 구절인 마태 19,8에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로 표현된다. 여기서 신명 24,1을 가리키는 “그런 계명”을 통하여 예수는 논쟁의 상대방을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시기에 반항했던 이스라엘과 유사하게 지적한다. 모세의 계명은 오히려 그들을 거슬러 증언한다. 이 계명은 창조의 원칙에 비하면 하나의 잉여이다.

이혼과 관련하여 신명 24,1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여기에서 “추한 것”은 예수 당시의 유다이즘 안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샴마이 학파는 더 제한적이고 엄격한 의미로, 즉 아내의 성적인 나쁜 행실과 같은 성적 도덕성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반해 힐렐 학파는 더 넓게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음식을 잘 못 한다, 아내가 늙어서 아름답지 못하다, 빵을 굽는 데 태운다, 죽을 끓이는 데 냄새가 나게 하는 경우 등이 이혼의 이유에 포함된다. 라삐 아키바는 더 넓게 해석하여 남편이 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면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혼에 대한 당시 유다이즘의 이해는 예수의 관점과 초대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예수는 성경의 논증을 통해 신명 24,1의 계명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뜻과 창조의 원칙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창세 1,27(“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과 창세 2,24(“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이 중심 본문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해소하려는 인간적인 시도에 반대한다.

 

예수, 렘브란트

예수는 이혼을 거부한다, 왜?

역사적 예수는 당시 대부분의 사회적 제도를 인정하였듯이, 혼인을 정상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다. 즉 예수는 혼인과 가정을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통합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아울러 동시대의 유다인들처럼 예수는 그의 가르침에서 혼인에 대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 당시의 가족 관계, 즉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주인과 종의 관계는 철저히 위계 질서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그리고 여성은 철저히 차별되었다. 당시의 전형적인 유다 관습에 따라 대부분의 예수 제자들은 결혼을 하였다(마태 8,14; 20,20; 27,56; 마르 1,30; 15,40; 루카 4,38; 8,3).

예수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라고 말한다. 병행 구절들인 마태 5,31-32: 19,9; 마르 10,11-12; 루카 16,18은 이혼에 반대하는 예수의 입장을 전한다. 이 네 구절 가운데에서 루카의 본문(“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이 가장 예수의 본래적 말씀에 가까울 것이다. 예수는 쿰란 사본에서 확인되는 당시 팔레스티나 유다이즘의 관점과 같이 이혼과 재혼에 반대한다. 남자와 여자는 이혼해서는 안 되고, 남편은 아내를 소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마태오의 구절들은 예외를 제시한다. 즉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마태 5,32)와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마태 19,9)이다. 이 예외는 마르 10,11-12; 루카 16,18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태오의 이혼 조건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무제한적인 권한에 대한 바리사이의 의도에 반대하는 입장의 표명이다. 모든 이유의 이혼을 포함하는 바리사이와는 달리 마태오의 예수는 이혼을 위한 한가지의 이유를 허용함으로써 남편의 권한에 제한을 가한다.

마태오 본문들의 불륜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CD IV 19-V 11에서 언급되는 벨리아르의 세 개의 함정 즉 불륜, 부(富), 성전의 세속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벨리아르의 함정 중에 불륜이 있다. 『다마스쿠스 문헌』에 따르면, 중혼(bigamy)과 일부다처(polygamy)는 단죄 되는데, “성벽을 세운 이들은 평생 두 명의 아내를 가져 두 번 불륜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런데 창조의 원칙은 ‘그분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이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간 이들은 ‘수컷과 암컷 둘씩 방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르 10,11-12은 아내가 남편을 소박할 수 있었던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형성되었다. 이것은 유다인들의 율법에 의해 허용되는 입장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당시 대다수 유다인들의 실천과는 반대로 이혼을 거부한다. 이 점에서 예수는 쿰란-에세네파의 입장과 일치한다. 둘 다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재혼으로 이끄는 이혼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혼은 간음에, 즉 간음하는 재혼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율법은 간음을 금지한다.(탈출 20,14.17; 레위 20,10; 신명 5,18.21; 22,22-27)

이와 같이 예수와 쿰란-에세네파는 이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자유로운 태도에 비판적이다. 다양한 쿰란 사본이 증언하는 것처럼 예수는 쿰란-에세네파와 함께 신명 24,1에 드러난 모세의 율법과는 반대로 말라 2,14-16(“네가 배신한 젊은 시절의 네 아내와 너 사이의 증인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고 너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이다. 한 분이신 그분께서 그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느냐? 몸과 영이 그분의 것이다. 한 분이신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느님께 인정받는 후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 젊은 시절의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 정녕 나는 아내를 내쫓는 짓을 싫어한다. ─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는 제 옷을 폭력으로 뒤덮는 자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러므로 너희는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 배신하지 마라.”)과 같은 입장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창세 1,27; 2,24에서 나타난 창조의 원칙에 따라 이혼에 반대하고 일부일처(monogamy)를 지지하는 것이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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