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히브리인들이 경험한 하느님 이야기
상태바
성서, 히브리인들이 경험한 하느님 이야기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2.04 1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경과 부르심-1]

성서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책마다 나오고 또 나오는 큰 주제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한 주제들이 나오는 구절을 묵상하는 것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주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여는 아주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성서 작가들이 영감을 받아 쓴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서 안에서 발전되어 온 경위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는 차원에서 성서의 의미와 그것을 구성하는 책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현시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성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쓴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야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더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희망이며 약속이라는 것을 서서히 드러내심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역사는 히브리인들의 신앙 공동체를 더 큰 일치와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걸작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우리를 백성으로서 구원하신다. 우리를 한데 불러모으는 과정에서 그분은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당신께로 인도하시는 동시에 우리를 한데 결합시키신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다: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 40,6-9)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실체를 알고 있었다. 얼마 후 예언자는 다시 말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사야 55,10-11)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당신도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약속이다. 주님의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이 비옥한 땅에 떨어졌다면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수확을 거두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먼저 온 이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히브리 사람들은 믿음의 공동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지구상의 다른 민족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방법을 깨달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신구약 성경, 2100년 간의 이야기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알게 된 후 이 민족은 자유로워졌다. 생활 안에서 경험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성서의 책들을 우리는 구약이라고 한다. 히브리인들이 '타낙'이라고 부르는 구약은 모두 4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은 인간의 삶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여 준다. 성서를 읽어 내려 갈수록,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겪은 성장 과정이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모든 개인과 민족이 겪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하느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시고 하느님이 주신 해방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지를 깨닫게 된다.

개신교에서는 구약의 몇몇 권이 사실은 성서의 일부분이 아니라 유대인의 저술서인 ‘외경서’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외경서에 포함하고 있는 책들은 마카베오 1,2 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시락, 바룩, 그리고 다니엘서의 일부다. 그러므로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구약성서는 간략해졌으나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다. 어떤 형태의 성서를 갖고 있든지 그 기본적인 메시지는 똑같다.

이 유대인 성서 이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성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인격화되고 표출된 새로운 말씀이다. 신약은 총 27권으로 되어 있으며 약 100여년에 걸처 쓰여졌다. 구약이 대략 2000년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므로,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의 2,100여년 간의 경험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믿음은 문자 너머에, 사람에 있다

이 경험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대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는 성서의 저자들이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주님이 성서의 저자들에게 진실로 말씀을 하셨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오고 간 영감으로 가득찬 대화가 어떻게 믿고 귀 기울이는지 아는 사람들 안에서 여전히 계속 되고 있음을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이스라엘인의 경험이 현재 우리들의 규범인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성서의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본주의적인 태도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에 있다. 그 분은 우리를 인격적인 대화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자구를 이상화시키는데 매달려 결국 경직되고 편협한 방법으로 성서를 몰아간다. 말씀은 우리를 인격적인 대화로 이끄시는데, 여러가지 면에서, 천사와 씨름한 야곱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창세기 32,23-33).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신 신비를 마주 대할 수 있게 된다.

야곱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하느님께 대항한 강한 이”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순간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이 되었다. 그 민족은 하느님의 신비와 씨름하는 경험 속에서 태어났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하느님과 똑같은 씨름 경기에 참여하게 된다면 우리도 새로운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쉬운 답은 없다. 단순한 답은 없다. 쉽고 간단한 답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인류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서는 역사책이 아니다, 순례이며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순례, 거기에는 길이 없다. 길은 걸어나갈 때 생기는 것이다. 여정을 떠날 때 비로소 우리는 답을 얻게 될 것이다. 항상 정돈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머리”로 깨달을 수 있는 답은 아니다. 그것은 대개 “깊은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답들이다. 그것들이 바로 의미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우리가 구하고, 필요로 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바로 의미와 삶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목적은 이 복음을 나누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성서는 역사책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을 가르치고 있지도 않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는 책도 아니다. 성서는 종교적인 진리, 즉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르치기 위한 책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며, 우리가 생각했던 성서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비판할 수도 없다. 성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즉 우리를 진정 살게 해주는 빵,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준다.

비평가 아닌 참여자로 성서 읽어야

성서의 어느 한 구절도 다른 구절과 분리해 고립되어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성서의 첫번째 책들은 마지막 책이 다 쓰여지기 전까지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책들의 배경 속에서 각각의 책들을 읽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성서의 한 구절이나 따로 떼어낸 한 문장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그저 문장들에만 집중하여 계속 읽어 나갈 경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서 안에서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서 전체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문장들을 모두 아우르는 성서의 대주제를 이해하는 것,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전체적인 비전을 보고,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로워 뼈골수에서 갈라진 관절처럼 영혼이 정신으로부터 갈라진 곳으로 꿰뚫고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했다(히브리서 4,12-13). 당신이 방관자의 입장에서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얻고자 성서를 읽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냉정한 비평가처럼 뒷짐이나 지고 서서 말씀이 당신 삶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라고 강요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당신 삶을 변화시키는 그 힘을 절대로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랑이 지식에 우선한다

성서는 믿음 안에서 쓰여졌고 믿음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어린이처럼 되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이런 믿음의 태도로 성서를 읽을 때만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속에서 말씀하시게 된다.

프란치스코 신학은 사랑이 지식을 우선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뒷짐지고 서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계산할 때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그 누군가에, 그 어떤 경험이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내어 줄 때야만 비로소 그 사람, 경험, 말씀이 우리에게 말을 하게 된다.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면, 믿음의 도약, 사랑의 행위,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을 해야 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논리나 철학을 가지고 성서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발을 내딛어 신뢰하고, “주님 만일 당신이 참으로 주님이시라면 제 삶 안에 당신을 보여주시고 제 마음에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라고 초대하고 싶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그 분을 우리 주님으로 생각할 때만 비로소 그 분의 말씀의 능력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서 그 힘을 보게 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