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사랑하고, 서둘러 슬픔을 멈출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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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사랑하고, 서둘러 슬픔을 멈출수 없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2.0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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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제가 테오도르 원장을 만나러 와서 말하기 시작했고 그 자신이 아직 시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배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동을 걸지 못 했소. 그래서 당신은 항해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미 도시에 와 있는 것 같네요. 자, 당신의 일을 먼저 해 보시오. 그러면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시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강박적인 관심들 가운데 하나는 속도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그 전의 것들 보다 더 빨리 간다. 비행기는 음의 속도 보다 빠른데, 아무도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자동차들은 한 시간에 60마일씩 순식간에 달리는 능력에 따라 팔리는데, 마치 사람들이 그런 속도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 달러가 호가되는 컴퓨터 업그레이드는 그 전의 컴퓨터들 보다 천분의 일초 작업속도를 빠르게 하면서 데이터를 전송한다.

요즘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모든 것은 더 빨리 가야하고, 더 빨리 출발해야 하며, 인간의 머리로 계산할 수 없는 숫자들의 속도로 작동한다. 우리는 인스턴트 음식, 더 고급화되는 교육프로그램, 주말 대학코스, 그리고 30초 안에 전 세계 뉴스를 듣기 원한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과를 원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과정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며, 다만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러나 사막의 수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영적인 삶이 고속기아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적인 삶-관상-은 영혼의 장치를 늦게, 늦게 밝혀나가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시 함께 모으고 우리가 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즉 하느님이 모든 곳에 계시며 무엇보다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더 느린 과정이다.

충분히 역설적이게도 서두름 속에서 우리세대는 시간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속도는 우리에게 시간을 저축해 주지 못했다. 다만 전에 하던 것 보다 두배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채울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더 빨리 갈수록 우리는 더 많이 우리자신을 뒤에 남겨둔다. 우리는 석양을 보기 위해 이제 더 이상 멈추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석양의 사진을 찍으며 그리고 나서 그 사진을 다시 보기 위한 시간을 절대로 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서두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슬픔의 과정을 서두를 수 없다. 우리는 성장의 프로젝트를 서두를 수 없다. 우리는 상처의 영향들을 서두를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이 오는 것을 앞당길 수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과정을 휙휙 날 듯이 시도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나서 일생동안 그 일에 실패했다고 하며, 결실이 없다고 해서도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온다. 이 모든 것들은 각각 영혼이 일하는 과정들이다.

관상가는 시간이 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견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마침내 우리자신을 깨고 나와 우리 안과 주변에 계신 하느님께로, 모든 생명이 흘러나오는 그 분께로 열리기 위해서는 삶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일생동안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삶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관상가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든 기관이 하느님이 아님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을 상징하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이 아니며 따라서 어떤 상징도 절대화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느님이 아님을 배워야 한다. 세계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성장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장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 어떤 기관에도 담을 수 없으며 우리가 숨쉬는 숨결 그 자체이신 하느님이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도록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하느님은 여기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간이 우리의 모든 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선물임을 배워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가 어떤 상황, 단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더 많이 가질수록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시간을 어떤 소모품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주는 성사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늘.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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