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런 부랑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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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런 부랑자, 예수
  • 한상봉
  • 승인 2017.11.2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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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8

예수가 부랑자였고 떠돌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하긴 갈릴래아의 흙바람 속을 떠돌며 산기슭에서 선잠을 청했던 전직 목수에 대한 기억을 그 제자 공동체인 교회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위 성직자들이 잊어버린 것은 훨씬 이전부터였다.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로, 예수는 비천한 무리 가운데서 승천하여 황제의 반열로 승격되었다. 웅장한 유럽의 대성당에 그려진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들 어디에서 당신의 가난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던 나자렛 예수를 느낄 수 있는가? 다만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만이 성당을 장식하고, 또한 실제로 제국의 법이 온 교회를 다스리지 않는가? 아아, 교황청을 볼 것까지도 없다. 온 세계의 주교관을 방문해 보라. 교회는 일종의 종교적 관료주의를 낳았다. 사목자들은 어느 새 고급 관료와 공무원이 되어 버렸다.

 

La Madonna di San Sisto is an oil painting by the Italian artist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와 부유한 성직계급

16세기의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궁정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가 세속적으로 대성공한 비결은 천박한 갈릴래아의 예수 대신에 영광된 그리스도만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길만이 지배자들과 부유한 성직 계급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누린 행운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이탈리아의 지배 계급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물질적인 사치와 위대성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허영에 아첨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을 모두 성인으로 그렸거나, 가톨릭 신화에 나오는 반(半) 신-인(神-人)으로 그렸다. 모든 금욕의 자취는 지금 교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리스도교 신사들과 부인들과 처녀들과 신들과 성인들이며,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목을 내밀고, 배를 불룩 내밀고, 불그레한 얼굴로 한창 잘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의 황홀감은 그들의 소화 운동을 방해하는 간섭을 허락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비밀 소식을 가지고 왔을 때, 천사는 그미가 목수의 헛간이 아니라 궁성(저택)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울고 있던 부인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지런히 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들의 옷을 정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보고 어떤 이는 “성모 마리아는 넋을 잃은 듯이 보이며, 울고 있는 모든 머리 모습은 뛰어나게 우아해 보인다”고 하였다.

도련님 예수, 양반 규수 마리아

한국 교회가 토착화의 관점에서 제작했다는 성화(聖畵)·성상(聖像)·순교자들의 그림을 보라. 양반집 도련님을 안고 있는 규수인 성모 마리아. 감히 청년 예수의 모습은 토착화된 모습으로 그리지도 못하는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기 예수는 여지없이 도령이며, 성모 마리아는 때로 왕비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순교자들의 피묻은 옷가지는 역시 말끔한 양반의 복장으로 둔갑하거나, 극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모습이 너무도 단정하고 깨끗하고 고상하다. 마늘을 다듬고 전복을 까고 옹기를 굽던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순교자들의 그림에서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고상한’ 유한 계급의 모습이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란 말인가?

이 엄청난 역사적 왜곡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대의 어느 철학자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소에게 하느님을 그리라면 당연히 소의 형상으로 그릴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귀티 나는 성화들은 교회 권력의 중심에 있는 성직자들의 계급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예수를, 성모 마리아를, 그리고 순교자들마저 가난과 동떨어진 고상한 무리의 반열에 올려 놓음으로써 영적 안심을 얻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최소한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런 요소가 있지 않았는가 반성하지 않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교회가 남루한 예수의 모습 속에서 안심(安心)하는 데 인색하다면, 이 세상의 가련한 중생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서 구원을 청할 것인가.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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