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는 숨지고 교사는 잠들었다, "항상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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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숨지고 교사는 잠들었다, "항상 기도하여라."
  • 유대칠
  • 승인 2017.11.2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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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8]

예수의 고뇌에 찬 간절한 기도는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만큼 간절했다. 예수가 그처럼 기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그만 잠에 빠져 있었다. 이를 두고 예수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말했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사도 바오로 역시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정말 쉽지 않다. 깨어있으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정말 쉽지 않다. 어렵다. 힘든 일이다. 여기에서 예수와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입으로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기도하는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자신을 돌아오는 기도, 항상 깨어있는 기도는 단지 말을 넘어선 삶이 된 기도가 되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삶이 되는 기도, 이 역시 더욱 더 쉽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여정이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이란 그저 목표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 여정 역시 행복이다. 만일 소유만이 행복이라면 우리네 삶은 불행하다. 결국은 죽을 것이고, 죽기 전까지 절대 변하지 않을 가장 온전한 삶의 목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소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행할 뿐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록 현생에 이루지 못한 꿈이라도 그 꿈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는 그 여정 역시 행복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안주하지 않고 무엇이 참으로 좋은 삶인지 매순간 고민하며 결단하는 고민하고 궁리하는 여정.

이렇게 생각하면 참된 행복을 향한 현실의 삶은 잠든 영혼에겐 불가능하다. 매순간 고민하는 깨어있는 영혼이어야 한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영혼의 치열한 고민이 녹아든 삶, 그런 삶이 기도가 녹아든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입으로 기도하는 시간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매순간 어느 것이 더 올바른지 고민하여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삶. 자신의 이성으로 자신의 삶을 끝없이 되돌아보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그러한 삶, 끝없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어느 것이 더 온전한 행복인지, 어느 것이 더 참다운 행복인지 고민하는 삶, 어쩌면 그러한 고민으로 이루어진 삶의 모습, 참 행복을 향한 그런 여정이 기도하는 삶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에크하르트는 또 다른 행복을 이야기한다. 에크하르트의 행복은 아예 소유를 포기하라 한다. 소유를 향한 여정이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아집에서 벗어나는 여정, 점점 더 청빈으로 다가가는 그 여정이 행복이다. 아집 속에서 욕심내며 누리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 아집에서 자유로워지는 삶, 그러한 삶을 행복이라 한다.

이런 에크하르트에게 기도하는 삶은 버림이다. 욕심도 아집도 영혼 가운데 많은 집착들도 버리는 것이다. 그 비움이 기도이고 수련이다. 에크하르트를 따르던 많은 여성 수도자들과 독일의 신비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기도를 따랐다. ‘포기’와 ‘비움’의 기도, 그런 시도가 녹아든 삶을 따랐다. 물론 이러한 비움은 상실이나 부정적 의미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근원적 본질로 돌아가 신과 하나 되는 방법, 신을 남으로 두지 않고 하나가 되는 방법이라 믿었다.

영혼이 잠든 곳에 자기애만 남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2부의 대부분을 행복을 향한 여정이 어떠한 것인지 다룬다. 행복을 향한 여정은 그저 좋은 것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치열한 고민으로 매순간 결단하고 의지의 강인한 힘으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에크하르트 역시 멍하니 그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참다운 기도이고 비움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자신을 성찰하여 고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는 모두 이러한 기도를 멈추지 말라고 권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가 멈추는 순간, 참다운 행복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자신에게만 좋은 것을 위해 남의 눈물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만의 쾌락을 행복이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성적 고민이란 성가신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기도가 멈추는 순간도 비슷하다. 욕심과 아집으로 행복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다투고 빼앗으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망 앞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기도가 멈춘다면 말이다. 기도가 멈추고 영혼이 잠들면 말이다.

기도가 멈춘 곳, 참다운 자기 고민이 멈춘 곳,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잠든 영혼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무질서한 자기애가 모든 죄의 원인이다.”

영혼이 잠든 곳에 자기애만 남는다. 그것이 참 행복이라 믿으며 말이다. 에크하르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자기 편의의 유혹에 빠진 상태, 자기애가 가득히 채워진 상태, 바로 영혼이 잠든 상태다.

‘주희’가 생각난다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 뇌병변(腦病變)을 앓던 힘없이 아픈 천사, ‘주희’가 생각난다. 지도교사는 음악을 틀고 옆방 다른 아이를 돌보다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 잠든 사이, 주희는 숨을 거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아이는 그 마지막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상상하기 힘든 아픔이다.

‘충주 성심 맹아원’의 지도교사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법원에서 다루어지는 법은 잘 모르겠다. 혹시나 무엇이 참다운 행복인지 고민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하는 삶의 관점에서 부끄러운 점이 있지 않은지? 혹은 아집과 욕심 그리고 자기애에서 벗어난 참다운 비움을 이야기하는 에크하르트의 기도하는 삶의 관점에서 부끄러운 모습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하여간 잠자고 있었고, 무죄다.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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